나는 이번에는 꼭 가리라 마음을 먹고 있었다. 집안의 장손임에도
불구하고, 사실 나는 여러 행사에 그리 많이 참석하지는 않았었다.
사실 이번에도 아빠 혼자서 가실 생각을 하고 계셨나보다. 날짜가 3
일인줄로 알고 있었던 나는 갑자기 아빠와 외할머니가 떠날 채비를
하자, 내가 날짜를 잘못알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설날 오후, 아무런
약속도 없이 세수도 대충하고 하루종일 하릴없이 빈둥거렸던 나는
갈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고 있었다. 귀찮은데 가지말아버
려? 그때 마침 막내가 밖에서 돌아왔고, 나는 막내에게 같이가자고
말했다. 막내가 가면 가고, 안가면 나도 집에 있어야지.
"민영아, 언니랑 같이 시골가자..."
분명 둘째는 가지 않을 것이 뻔했기에, 막내를 집중공략이다.
막내는 흔쾌히 가자고 하였고, 나는 그때부터 머리감으랴, 화장하
랴, 분주하게 움직였다. 결국 넷은 일곱시 반에 출발을 하였다. 우리
의 일정은 먼저 원주 외삼촌댁에 들렸다가 다시 엄정으로 가서 외할
머니를 내려드리고, 목적지인 덕산 시리미로 가는 것이었다.
작은 할아버지께서 벌써 칠순이시다. 우리 할아버지는 내가 고2때
칠순을 맞이하셨었다. 그 때, 나는 문학기행을 간답시고 참석을 하지
못했었다. 어쩌면 그때의 기억 때문에 이번 시골행을 결정지었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동생과 나는 신나게 떠들면서 - 아빠의 졸음운전을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 안개가 낀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그렇게 심한 안개는 처음이었다. 길이 보이지가 않았다. 땅으로 내
려앉은 구름속을 달리는 기분이었다. 안개비가 눈보라처럼 온땅을 휘
감고 있었다. 눈으로도 보이는 축축함. 그러나 왠지 모르게 싫지가
않은 느낌이었다. 당장이라도 차에서 내려 그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신비함... 안개가 나오는 날엔 귀신이 나온다거나, 무슨 신비스런 일
이 생긴다거나 하는 어느 글에서 읽은 이야기들, 영상물들이 떠올랐다.
안개가 걷히면 또 시골 하늘의 무수히 많은 별들을 쳐다보았다. 지
금은 많이 사라진 터였지만, 그래도 서울 하늘보다는 월등히 많은 별
들이 우리 위에 두둥실 떠 있었다. 내가 어릴적 보던 별들은 까만 하
늘에 하얀 별들이 박힌 것이 아니라, 하얀 하늘에 까만 점이 박힌 듯
많은 별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별을 보기가 힘들다.
원주를 거쳐 엄정에 다다렀다. 우리는 응골에다 우선 외할머니를 내
려드리기로 했다. 응골에는 세째 외할머니께서 계셨는데, 집을 신식으
로 새로 지어 무척이나 정갈하고 깨끗한 것이 좋기만 했다. 막내의 키
보다도 훨씬 작은, 허리가 약간 굽은 두분이 우릴 배웅할 때는 왠지
기분이 이상해지기도 하였다.
덕산으로 가는 길에도 안개는 자욱하였다. 아빠는 그 시골길을 어떻
게 다 아시는 건지, 잘도 길을 찾아가셨다. 뭐, 아빠가 태어나서 자란
고향일 탓도 있지만...
덕산 시리미는 아주 어릴 적에 가보고는 처음이었다. 내가 기억하기
로는 작은 할아버지댁 앞에는 큰 강이 있었고 - 나에게는 무척이나 아름
다운 추억으로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 거기에서 올갱이를 잡던 기억
과, 작은 물고기를 낚던 아빠의 모습이 단편적으로 박혀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막상 성인이 되어 간 그곳은 그냥 넓은 개울일 따름이었다.
"아빠, 여기 큰 강 아니었어? 왜 이렇게 작아?"
"어릴 적에는 커보이는 것도, 커서 보면 다 작지, 뭐."
그래도 나는 내 소중한 추억이 또하나 깨지는구나 하는 안타까운 마음
이 들었다.
작은 집에는 이미 많은 친척들이 와 있었다. 처음뵙는 분부터, 너무
오랫만에 보는 얼굴이라 이름도 잘 기억이 안나는 사람들... 하지만 새벽
한시 반에야 도착한 우리는 인사보다는 우선 시장기를 해결하는게 급선무
였다. 배고플때 먹는 밥이라서 그런지 그렇게 맛있을 줄이야. 물은 그냥
수도물을 받아마셨다. 친가나 외가나 다들 깊은 시골이라, 수도라고 해봤
자 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그냥 받는 것이다. 즉, 집에서 먹는 약수라고
해야하나.
장작을 때서 방을 뎁히는, 그리고 화장식은 푸세식인, 우리의 시골은
전통적인 농가다. 이미 외가는 두 집이나 신식으로 집을 고쳤지만 - 작은
외할아버지는 내가 어렸을 적부터 계속 이장직을 맡고 계신다 - 이쪽 친가
는 여전하다. 원래 내 고향도 한수면 탄지리, 깡촌인데 이미 그곳은 충주
댐을 짓느라고 물에 잠겨버린지 오래다. 나는 곧, 失鄕民이다.
각설하고, 삼촌들은 작은 방에서 포카를 치고, 아주머니들은 안방에서
고스톱을 치는 정겨운(?) 모습을 보며, 나는 잠을 청했다...
아침 7시에 일어난다는 것은 실로 기적이다. 나는 줄곧 아침 늦게나 오
후에 일어나고는 했는데, 역시 시골이라 그런지 그것도 늦은 기상이었다.
그런데도 워낙 식구가 많다보니 아침은 9시나 되어서 할 수 있었고, 케씐
절단식이 끝난 다음에 시작되었다. 특히, 친가쪽의 사람수는 어마어마하다.
갓난아기가 끊이지 않는 정도라 하면 이해가 될까? 막내고모가 두 딸 뒤
에 드디어 아들 하나를 낳았다. 생후한달밖에 안된 아이를 데리고 온 고모
가 정말 대단할 뿐이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드러내고 젖을 줄 수 있는
고모의 모습. 푸하... 난 숨어서 먹여야지. 쪽팔리잖아!
애들수만 해도 열댓은 되었을것이다. 그 부모들도 생각해보라~~. 게다가
그 윗대까지 간다면 엄청난 수가 모인 것이다. 또, 시골은 거기서 거기가
다 한식구라, 식사상만 해도 몇번을 다시보아야 하는 우리의 아주머니들.
엄마가 일땜에 못온게 다행이었다. 그리고, 나라도 대신 온것도 다행이었
다.
다시 엄정으로 외할머니를 데리러 가면서 나는 물에 잠긴 내 고향을 볼
수가 있었다.
"아빠, 아빠랑 나랑 태어난 데가 같아?"
"아니, 한마을에서 태어나긴 했는데, 아빠도 잘 기억이 안난다."
나는 그 복작거리던 시리미를 벗어나 엄정으로 향하면서 여러 생각을 했
다. 나의 根本, 나의 뿌리, 나라는 인간에 대한 정체성. 나는 결국 시골에
뿌리를 둔, 지극히 서민적이고, 지극히 가난한, 그러나 정겨운 사람들 속
에서 자라온 그런 사람일 뿐이다. 이화여대라는 엘리트 집단에서 - 내가
속해있는 여러 다른 집단도 포함하여 - 지극히 도시적이고, 세련되고,
풍요로운 삶을 누리는 사람들과 교제를 하고는 있지만, 나의 기본이란 바로
저 시골에서 묻혀온 내 코트자락의 냄새와 다를 바 없다. 과거 양반이고
상놈이고는 필요없다. 이제는 현재의 삶만이 중요할 뿐이다. 텔레비젼에서
나오는 고상한 조부모와, 훌륭한 양옥집들, 단란한 가족의 모습은 나와는 먼
얘기다. 나는 오로지, 내 가족들에게 속해있을 뿐이다.
이미 화장실마저 쓰러져버린, 우리 외할머니댁에는 1년 반만에 다시 온
것이었다. 재작년, 동아리 기장을 맡으면서, 동기들을 MT랍시고 데려왔던곳
. 나에게는 너무나 소중해서, 내 가장 소중한 사람과 언젠가는 다시 찾으리
라고 되뇌이고 되뇌이는 곳. 얼른 외할머니를 다시 원주로 모셔다 드리고
우리도 다시 서울로 돌아와야 했기에 얼마 있지는 못했지만, 마음만은 기뻤
다. 우리 셋이 다 대학졸업하면 엄마와 둘이 시골로 내려와 살거라는 아빠.
나도 시골에서 살고 싶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잠을 자버리고 말았다. 밤을새고 원주에서 몇시간 잠깐
눈을 붙인 아빠도 운전을 하는데, 정말 미안했다. 내가 운전면허 따서 교
대로 운전하자고 아빠한테 그랬더니, 아빠차는 보험이 27살 이상이어야 된
다고 한다. 그래서, 사고나면 얼른 자리를 바꿔앉자고 그랬다. ^^
내가 수업료전액 장학금을 타면 아빠가 운전학원에 보내주신단다. 내 돈
으로 하는것보다 그게 더 낳을것 같다. 물론 내가 장학금을 타리라는 보장
은 없다. 그래도 그게 어딘가. 우선 약속을 했으니, 앞으로 공부나 열심히
해 봐야지.
집으로 돌아오는데 허리가 아파 죽는 줄 알았다. 자다가 깨니 더 했다.
동생과 아빠는 엉덩이가 아프댄다.
"너는 엉덩이도 뚱뚱한 놈이 왜 아프냐?"
동생의 엉덩이가 뚱뚱한가? 확실히 나보다 살이 많기는 많다. (참고로 내
가 우리집에서 가장 몸무게가 덜 나간다.)
집으로 돌아와 짐을 내려놓는데, 짐이 장난아니게 많았다. 친가에서 싸온
것은 고작 떡이랑, 산적 정도로 내 책가방에 다 들어갔는데, 역시 딸은 다
도둑이란 말이 맞는 모양이다. 외할머니가 주신 고구마, 콩, 깨, 기름, 호
박 등등과 외삼촌이 사주신 귤 한박스가 왜이리 많아 보이는지. 나중에 나
도 엄마한테서 이만큼 뺏어올까?
아빠 말로는 우리가 590KM를 뛰었다고 한다...리로 계산하면, 엄청나지.
비록 차안에서 보낸 시간이 더 많았지만, 그래도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던
나에게는 즐거운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