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처) 문화일기 136 VIR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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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hor ( Hit: 194 Vote: 1 )

* VIRUS, 1999, 영화

언제나처럼 여전히, 아침에 통신을 하다 시간에 쫓겨 출근
을 한다. 아, 또 권태로운 하루가 시작되는군. --;

일을 하라고 마련해 놓은 사무실 책상에 앉아도 할 일이
없는 건 마찬가지다. 난 널널하게 한 방울씩 비가 내리는 창
밖을 바라보다 어느새 달력을 향해 있는 내 눈길을 발견한
다. 4월 13일 화요일... 벌써 4월도 반이나 흘렀군...

아 참! 그 때 문득 민석이 준 영화 시사회표가 떠올랐던
게다. 바로 오늘이군! 이거 원.

표는 두 장인데 마땅히 함께 갈 사람이 떠오르질 않았다.
옆 사무실 그녀에겐 함께 보자고 말할 용기도 없고. 난 소심
한 사람이다. !_!

근심 어린 눈길로 표를 보고 있자니 예전 호겸과 함께 [삽
질]이란 이름을 달고 행했던 일들이 떠올랐다. 상황은 아주
흡사했다. 두 장의 시사회표, 그리고 나.

적어도 껄떡거림계에서 시사회표 두 장의 가치는 일반표
두 장의 가치보다 크다. 왜냐하면 "제게 영화표가 두 장 있
는데 같이 보러 가실래요?"는 인위적인 맛이 나지만 우연히
얻은 시사회표는 자연스럽다.

결국 난 그 시절, 그 수법을 다시 써보기로 결심했고, 며
칠 전 Chatting을 통해 알아놓은 그 아이의 연락처를 기억해
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라곤 오직 그 아이의 PCS 번호밖
에 없었다. 그녀의 성격이 어떤지, 생김새는 어떤지, 그런
것들은 전혀 알아두지 않았기에 조금 모험이긴 했다.

그렇지만 그것이 내가 갖고 있는 유일한 카드였기에 난 그
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녕!", 난 이름도 모르는 그녀에게 첫인사를 건넨다. 우
리는 서로 아는 게 거의 없다. 내가 그녀의 PCS 번호를 알고
있다면 그녀는 내 프로필 사진만 보았을 뿐이었다.

내 제안을 그녀는 조금은 조심스러워 하면서도 순순히 받
아드린다. "그래. 이따 거기서 만나."

덕수궁 앞에서 그녀를 처음 만나게 되었는데, 뜨아, 이런
일이! 그녀는 완전 퀸카였던 게다. 허허. 키는 170cm에 쫙
빠진 몸매, 게다가 스커트까지! 허허. ^^*

정동극장에 들어섰을 때는 상영시간을 조금 넘은 19시 15
분 경. 화면에서는 거대한 태풍이 있었다.








에일리언과 꽤나 비슷한 영화였는데 이런 류의 영화중에서
는 가장 흥미있게 본 듯 하다. 다른 건 몰라도 영화를 보면
서 이렇게 깜짝깜짝 놀랐던 적은 지금까지 없었다.

특히 좋았던 부분은 그 태풍을 표현한 모습이었는데 상위
구도로 잡은 태풍의 눈 속에서의 모습은 정말 압권이었다.
작게 표현된 배 한 척이 거대한 자연의 힘, 태풍 속에서 아
주 잔잔히 흐르는 모습, 마치 Dream Theater의 음악을 듣는
느낌이 들었다.

다소 아쉬운 점이 있다면 나름대로의 특색이 희박한 편이
었고, 과학, 기계 문명이 가져올 인간애의 상실 따위의 주제
가 너무 식상했고, 또 너무 교육적이었다는 것 정도.

영화가 끝나고 넌지시 물어보았다. "늦었으면 집에 가고,
아니면 차나 가볍게 술 마시고 가자." 난 뭐 어떻해도 괜찮
은 편이었지만 나와 함께 있는 게 불변한 여자와는 아무리
아리따운 여자라 하여도 같이 있고 싶지 않다. 그리고 다시
는 안 볼 여자라 하여도 좋은 인상을 심어주고 싶다.

"나 시간은 정말 많아.", 그녀의 대답으로 편안해 졌다.

종로까지 걸었다. 택시 타고 가겠냐고 물어보았더니 뭐든
상관없단다. 무슨 술 좋아하냐고 물었더니 뭐든 상관없단다.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여자였다.

조금은 쌀쌀한 날씨였지만 걷기엔 안성맞춤이었다. 하늘
높이 솟아 있는 빌딩숲, 화려한 자동차 라이트 속에서 걷는
건 매력적이란 생각을 하였다.

레몬소주를 시키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내 썰렁하고
보잘것없는 얘기도 귀 기울여 들어준다. 수줍게 웃는다. 그
렇게 벌써 23시. 지하철 끊길 시각.

그런데 그녀는 도무지 나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우리 그
만 일어나자, 이러다가 차 끊기겠다." 내가 먼저 일어선다.

지하로 뻗은 역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그녀가 입을 열었
다. "우리 노래방 들렸다 가자.", "그럼 차 끊길텐데?", 그
녀는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버스 타고 가면 돼.", 라고
말한다.

노래방, 여러모로 역시 편안하게 해준다. 노래가 끊나니
24시 20분.

다시 버스정거장으로 향한다.

"너 당구 잘 쳐?", 이번엔 당구다. 그녀의 마음이 느껴진
다. 그녀는 나와 여관을 가고 싶어하고 있다.

냐하, 당삼 콜이지! ^^;
...였다면 내가 이런 글을 썼겠느뇨. 허허. --;

아, 젠장, 비극은 이제부터다. !_!
사실 요 며칠 서울 시내 각 지를 돌아다니며 소개팅을 몇
차례 했었는데 학교를 자퇴한 고삐리나 영계들을 만나느라 1
차, 2차, 3차 연이어 쭉 내가 다 써버리느라 가산을 탕진했
던 게다. !_!

여관비만 있었다면, 허허, 콜이었겠지만 눈물을 머금고 그
녀를 집으로 돌려보낸다.

버스가 왔다. "다음 거 탈께.", 다시 버스가 왔다. "다음
거 탈께.", 그녀는 계속 미룬다.

그녀는 내 아쉬운 심정을 아는 지 모르는 지 새침한 표정
을 지으며 세 번째 버스에 오른다.

"오늘 정말 편안했어. 다음에 꼭 연락해. 꼭.", 그녀의 마
지막 인사.
ps. 내 一場春夢이라 말하여도 괜찮겠지만 그녀를 값싸게
보는 건 절대 사양하겠음. 그런 느낌을 받았다면 그건
전적으로 상황을 잘 표현해 내지 못한 내 열악한 문장
력에 있는 것이지 그녀의 탓은 아니란 사실을 밝혀둠.
꺼억.







98-9220340 건아처


본문 내용은 9,453일 전의 글로 현재의 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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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Written: 02/26/2009 00:56:26
Last Modified: 08/23/2021 11:46: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