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처) 문화일기 154 홀로 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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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hor ( Hit: 203 Vote: 1 )

+ 홀로 서기, 서정윤, 청하, 1987, 시, 한국

- 홀로 서기
― 둘이 만나 서는 게 아니라
홀로 선 둘이가 만나는 것이다

1

기다림은
만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좋다
가슴이 아프면
아픈 채로,
바람이 불면
고개를 높이 쳐들면서, 날리는
아득한 미소

어디엔가 있을
나의 한 쪽을 위해
헤매이던 숱한 방황의 날들
태어나면서 이미
누군가가 정해졌었다면,
이제는 그를
만나고 싶다

2

홀로 선다는 건
가슴을 치며 우는 것보다
더 어렵지만
자신을 옭아맨 동아줄,
그 아득한 끝에서 대롱이며
그래도 멀리,
멀리 하늘을 우러르는
이 작은 가슴
누군가를 열심히 갈구해도
아무도 나의 가슴을 채워줄 수 없고
결국은
홀로 살아간다는 걸
한겨울의 눈발처럼 만났을 때
나는
또다시 쓰러져 있었다

3

지우고 싶다
이 표정 없는 얼굴을
버리고 싶다
아무도
나의 아픔을 돌아보지 않고
오히려 수렁 속으로
밀어 넣고 있는데
내 손엔 아무것도 없으니
미소를 지으며
체념할 수밖에...
위태위태하게 부여잡고 있던 것들이
산산이 부서져 버린 어느날, 나는
허전한 뒷모습을 보이며
돌아서고 있었다

4

누군가가
나를 향해 다가오면
나는 <움찔> 뒤로 물러난다
그러다가 그가
나에게서 멀어져 갈 땐
발을 동동 구르며 손짓을 한다

만날 때 이미
헤어질 준비를 하는 우리는,
아주 냉담하게 돌아설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아파오는 가슴 한 구석의 나무는
심하게 흔들리고 있다

떠나는 사람은 잡을 수 없고
떠날 사람을 잡는 것만큼
자신이 초라할 수 없다
떠날 사람은 보내어야 한다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일지라도

5

나를 지켜야 한다
누군가가 나를 차지하려 해도
그 허전한 아픔을
또다시 느끼지 않기 위해
마음의 창을 꼭꼭 닫아야 한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얻은 이 절실한 결론을
<이번에는>
<이번에는> 하며 어겨보아도
결국 인간에게서는
더이상 바랄 수 없음을 깨달은 날
나는 비록 공허한 웃음이지만
웃음을 웃을 수 있었다

아무도 대신 죽어주지 않는
나의 삶,
좀더 열심히 살아야겠다

6

나의 전부를 벗고
알몸뚱이로 모두를 대하고 싶다
그것조차
가면이라고 말할지라도
변명하지 않으며 살고 싶다
말로써 행동을 만들지 않고
행동으로 말할 수 있을 때까지
나는 혼자가 되리라

그 끝없는 고독과의 투쟁을
혼자의 힘으로 견디어야 한다
부리에,
발톱에 피가 맺혀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숱한 불면의 밤을 새우며
<홀로 서기>를 익혀야 한다

7

죽음이
인생의 종말이 아니기에
이 추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살아 있다
나의 얼굴에 대해
내가
책임질 수 있을 때까지
홀로임을 느껴야 한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홀로 서고 있을, 그 누군가를 위해
촛불을 들자
허전한 가슴을 메울 수는 없지만
<이것이다> 하며
살아가고 싶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사랑을 하자
초등학교 시절 시에 전혀 문외한이었던 우리에게조차 알려
질 정도로 유명했던 그 홀로 서기,를 10년도 넘은 지금에 와
서 짐짓 가세를 가다듬으며 읽어보았다.

기다림은 만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좋다,란 이미 유명
해진 구절로 시작하여 태어나면서 이미 누군가가 정해져었다
면, 이제는 그를 만나고 싶다,며 잔잔한 그리움을 쥐어주고
끝나는 그 홀로 서기.

처음 홀로 서기,는 평범한 시어로 쉽게 쓰여졌기에 다른
사랑을 노래한 어떤 시보다도 마음에 와 닿었다. 그리하여
난 미세한 가슴 속의 떨림까지 느껴가면서 참 즐거우면서도
고통스럽게 시를 읽었었는데, 헉, 아니나 다를까 서정윤도
자신이 괜찮은 시인임을 과시라도 하고 싶었던지 시 후반부
로 갈수록 기존의 여타 시인과 비슷한 양상을 보여주고 말았
다.

그리하여 다소 식상하면서도 지겨워졌었지만 어쨌든 누군
가에게 시집을 선물해야한다면 지금 같아선 난 아마도 이 홀
로 서기,를 선물하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대개 시집 뒷부분에 수록되는 해설란에 박덕규 씨
는 의외로 기존의 맹목적인 찬양조로부터 벗어나 서정윤의
고통의 과정이 생략된 관념적인 시를 지적하는 면이 보여 상
당히 독특했음을 기록해 둔다.



990902 13:50 가슴이 아프면 아픈 채로,
바람이 불면 고개를 높이 쳐들면서,
날리는 아득한 미소.
태어나면서 이미 누군가가 정해졌었다면
이제는 그를 만나고 싶다...







98-9220340 건아처


본문 내용은 9,310일 전의 글로 현재의 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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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Written: 02/26/2009 00:56:26
Last Modified: 08/23/2021 11:46: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