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십분 격투 게임을 하다가 '테트리스'를 했어.
누군가 내 옆에 의자를 대고 앉아 게임을 이어서 하더군. 그녀가.
도서관의 아리따운 사서가.
"안녕하세요?"
"도서관은요?"
"점심식사 시간인걸요?"
"그래요?"
"그래요."
점심시간은 한 시간인가 그랬을거야. 식사를 마치고 졸린기운을 없
애려고 오락실에 들렀대. 과장님이 오셨으니 시간 있으면 도서관에
들러 보세요. 지금은 가 볼데가 있어서요. 다음에 들러 보도록 하죠
좋으실대로. 이번엔 그녀의 연락처를 알아내고 싶어졌어. 그런데
뭐라고 물어봐야 어색하지 않을까? '그쪽 연락처를 좀 가르쳐 주시
겠어요?" "네? 왜죠?" "마음에 들었어요. 당신이!" 역시 어색하고
뻔뻔스러운 대화다. 다른걸 생각해 봐야했어.
"당신 연락처를 알고 싶어요. 연락처를 모르면 연락할수가 없기 때
문이죠!" 안되겠지..?
떨어지는 블록을 끼워 맞추며 곰곰히 생각. 그녀가 먼저 말을 걸어
오더군.
"오락 잘 못하시나 봐요?"
낭패인가? 특별히 잘하는게 없던 내가 자랑할수 있는 몇가지 항목중
엔 전자오락도 끼어 있었거든.
"천만에. 오락은 정말 자신있는걸요?"
라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눈 앞의 모니터엔 'continue?' 라는 글자
가 반짝이더군. 난 100원짜리 동전을 기계에 밀어 넣었어.
벌써 네번째.
"다른건 잘해요. 다만 테트리스가 좀 미약한 부분이예요"
막 그녀의 눈 앞에도 'continue?' 라는 글자가 보였나봐. 자리에서
일어나 이제 가봐야 겠네요. 하더니 안녕히 계세요, 하더라구.
나보고 오락실에서 살라는 얘기인가? 여기에 계속 계실수는 없지.
아니요. 저도 이제 나가봐야 하는걸요? 이렇게해서 둘은 같이 오락
실 문을 밀고 나온거야.
"저녁에 연락할게요."
"어디로요?"
"도서관으로요."
"저녁때는 저 말고 다른사람이 일하는걸요?"
그녀의 대답이 '왜요?' 가 아니고 '어디로요?' 였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연락을 하겠노라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일단은 성공이었지.
그녀의 연락처를 알아냈거든.
"저녁에 연락하시려면 여기로 하세요." 하면서 그녀는 자기 다이어
리에 연락처를 적어 주더군. 휴대폰 번호였지. 그 당시만해도 무척
귀한 물건이었는데. 예의상 나도 그녀에게 호출기 번호를 가르쳐 주
었어. 그냥 예의상...
보통 사람들은 땅을 밟고 걸어다니지. 발바닥과 땅이 닿을때의 느낌
한걸음,두걸음. 그렇게 어디로든 움직이는 거야. 땅에 닿아서.
걷는건 마찬가지인데 발바닥이 땅에 닿지 않을때가 있어.
아니. 밟는건 분명한 땅일지도 모르지만 내가 느끼기엔 결코 옹골진
땅이 아니야. 알맹이를 온통 깃털로 채워 넣은 대형 쇼파의 느낌.
걷는게 걷는것 같지가 않겠지? 물컹. 재미있을것 같지만 그게 얼마
나 역겨운 느낌인지는 모를거야. 덤블링을 타는게 아니야. 난 내 허
벅지보다 굵은 구렁이를 밟으며 걷는거야. 한걸음, 한걸음이 발바닥
을 묻을때마다 무엇인가 내 발걸음에 짓밟혀 고통을 호소하고 있을
거야. 끼아악! 뚜렷하게 들리는건 아니지만 그럴때면 소름끼치는
비명같은게 느껴져. 아직도 아슬아슬하지. 감각이 감성을 앞서고 피
로가 인내를 앞서기에 난 어떠한 '악' 도 가치관으로 받아들일 준비
가 되어 있는거야.
물론 내가 모든 '악'으로 여겨지는 것들을 다 수용할 수 있을만큼
대담한것은 아니야. pc통신으로 만나게 된 친구중에 용산 기지촌에
사는 여자가 하나 있었어. 그렇다고 홍등가나 단란주점에서 일한다
는건 아니고 단지 집이 용산에 있었을 뿐이야. 그 아이는 알고지내
는 미국인이 참 많더군. 본의 아니게 나도 몇몇 미국인들을 만날수
있었어. 남자 서넛에 여자가 하나였지. 남자들은 모두 군인이었고
여자는 아버지가 외교관이었어. 나와 동갑인 사람은 미군하나.
나머지는 모두 나보다 한 두살정도 위였지. 그중 가장 돋보이는 사
람은 '스티브' 라는 미군이었어. 나이는. 미국나이로 22살이었고.
무리중 가장 돈이 많았어. 내가 학교에서 영어를 배우고 있다 하니
무척 좋아하더라구.가끔 스티브 일당이 모이는 아지트에 나도 끼어
서 놀고는 했는데, - 아지트라고 해서 특별한 곳은 아니고 스티브가
마련한 13평형 아파트야. - 보통은 바에서 꼬신 한국인 여자 아이
들과 밤새 흥청망청 놀다가 새벽녘에 이 아지트에 모이는 거지.
나도 그들 틈에 여섯번정도 휩쓸린 적이 있어. 처음엔 몰랐는데
언제부턴가 이들이 포카리스웨트와 물을 섞은뒤 이상한 가루를 타서
먹기 시작하더군.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이들의 유흥비와 아지
트는 모두 이 '가루'를 팔아서 마련한 것이었어. 허걱. 내가 있을곳
이 못되는군. 처음엔 돈 걱정없이 마음껏 놀수 있어 용산엘 자주 갔
는데, 말하자면 어떤 공.포.감. 같은게 일어 금새 그들과 연락을 끊
었지. 그래도 스티브가 소개시켜준 pc 통신의 여자 아이와는 아직까
지 연락을 하며 지내고 있어. 이제는 자기도 미국인들과 어울리지
않고 산다나? 집도 강남으로 이사를 했다더라구. 흠.....시간이 나
면 연락해서 한번 만나보고 싶다. 어떻게 많이 변했는지.
(처음 만났을때 그 아이는 온통 파란색으로 머리를 염색했었거든)
아무쪼록 모두들 고이 잠들지어다!
애간장 녹이는 현란한 멜로디도 좋지만 나는 머리를 멍하게 만드는
시원한 음악을 무척 좋아했다구. 쿠워어!
하면서 마치 자기가 멜로디와 아름다운 음색을 저주한다는 듯이
전자기타를 휘갈기잖아. 내.참.
그러니 들으면 들을수록 빠져들수밖에.
무슨일을 시작하기엔 너무 늦고 무슨일을 마치기엔 너무이른 3,4시
즈음에 주로 내가 가는곳은 대학로의 '뮤직 팩토리' 라는 해비메탈
음악 비디오 감상실이야. 대형화면 하나에 옆사람의 말이 안들릴 정
도의 시끄러움. 그리고 어둡고 칙칙한 분위기. 두,세시간 아무 생각
없이 보내기엔 제격인 곳이었지. 저녁 8시 약속, 좋아!
일단 뮤직 팩토리에서 두어시간 뽀개자. 는 심산으로 그 밀폐된 지
하실을 찾아 걷고 있었어.
"어, 혹시 남영이 아니야?"
"네? 아닌데요. 사람 잘못 보셨어요"
"아..아니. 혹시 소희 아니야?"
"어? 맞는데요? 저 아세요? ..... .. . 아. 정규구나! 어머, 몰라보
겠다. 겨우 일년 정도 지났는데도 꽤 멋있어 졌는걸?"
소희가 맞다. 고등학교 동창생. 소희가 맞다!
"어디 가는 길인가 보지?"
"아니야, 친구와 3시에 약속이 있었는데 무슨 일이 있는지 못 나온
대. 하는수없이 지금 집으로 가려는 길이구."
"잘됐네. 나는 무척이나 널널하다구.일년만에 우리 데이트나 할까?"
"좋아. 좋아. 정말 반갑다."
일진이 좋다고 해야하나? 소희는 예전에 내 짝사랑 여인이었어.
고등학교 1학년초에 난 소희에게 홀딱 반해있었지. 대단하게 좋아했
었다구. 편지며 선물. 마음 씀씀이 . 무진장 노력했는데 소희는 시
큰둥 했었어. 그렇게 에구야, 하며 지내다 지쳐 1년 지내고 2학년이
되었지. 기가막히게 기분이 좋았는데 소희가 나보고 애인이 되어달
라는거야. 너를 싫어 했던게 아니라며. 쓰기에 조차 유치하게 여겨
지지만 사실인걸 어쩌라구! 유감스럽게도 내겐 이미 정희가 있었는
걸? 정희와 네가? 응. 얼마나되었는데? 대충 석달쯤? 어쩔수없이 굉
장히 아쉬웠지. 그러다 고교 3년을 다 보내고 졸업을 해 버리더니
일년만에 이렇게 길거리에서 만난거야.
지하에 있는 커피숍에 들어 갔는데 약간은 위험한 곳이었어.
때가 일러서인지 손님이라고는 우리들 밖에 없었고 어두운 조명에
밀폐된 구조, 마치 무엇인가를 암시하는 듯한 분위기. 게다가 우리
가 선택한 좌석은 저기 끄트머리, 사람들의 눈으로 부터 꼭꼭 숨을
수 있는 외진곳. 그래. 짐작한대로야. 그럴의도는 없었는데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거라구!
"그땐 나도 아쉬웠지만 어쩔수 없었다구. 그나저나 지금까지도 애인
하나 없는거야?"
"Yes, 지금까지도 없어. 넌 정희와 왜 헤어졌어?"
"대학교에 둘 다 입학해 버렸기 때문이지"
"그게 무슨 소리야?"
"곰곰히 생각해 봤는데 왜 우리가 헤어지게 되었는지 모르겠어.
그냥, '철이 들었다' 정도? "
힐끗. 소희의 얼굴을 바라보았어. 예쁘다. 변한건 화장을
했다/안했다 정도 뿐인데.
"그때는 너와 키스하는 상상을 많이 했었는데"
라는 소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난 소희의 입술을 삼켜버렸어.
이상하리만치 자연스럽게...
깊은 키스를 나누며 난 소희의 등을 쓸어 내리며 자극적인 포옹을
했는데 그때 소희가 입고있던 하얀 블라우스의 감촉이 아직까지 손
끝에 남아있어. 가끔은 그 감촉이 눈물이 날 정도로 아련하게 떠오
르곤 해. 이제. 소희와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아직 끝난게 아니야.
소희와 6시경에 헤어져 나는 예정대로 '뮤직팩토리'로 갔지. 목요일
의 마지막 여인은 이곳에서 나를 기다리고있었다구.
뮤직팩토리 입구에 서서 문을 열고 슬쩍 안을 들여다 보았지. 열명
남짓한 사람들이 여기저기 앉아 있었어. 나는 뒷쪽에 자리를 잡고
Miller 한병 시킨뒤 안주로 나온 새우깡만 주섬주섬 챙겨 먹고 있었
지. 내가 들어올때만 해도 Oasis, Suede, AEROSMITH, GN'R .
조용했다구.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 둘 들어오기 시작하고 이내 음악
감상실이 인간들로 가득차니까 Nirvana, Sepuhura 가 나오더니
Megadeth, My dying Bride, Carcass, 여기저기 미친듯 머리를 흔들
어대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참 적응하기 힘들더군. 같이 놀아주기
힘든 타입의 인간들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