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옷 정리하면서 셔츠에서 "싱글"이란 마크를 봤다.
이젠 폐업한 양복점 이름이 "싱글"이다.
무일푼의 부모님이 결혼해서 울산시 성남동에 가계낸게 1976년인가 그렇다
서울오기전 1997년 직전까지 그곳에서 생활했던지라 나에게 유년시절의
모든 기억이 그 좁은 가계에 있다.
IMF 사태이후 싱글맞춤이란 양복점은 폐업했다.
사실 양복점 폐업은 내가 초등학교 때부터 생각하던거였다.
기성복에 밀려 누가 옷을 맞춰 입겠는가 ?
1990년 교복으로 잠깐 다시 돈이 되었지만 이후 나타난 거대 기업의 학생
복으로 결국 IMF의 한파를 이기진 못했다.
내가 대학들어간 1996년 부터 아버지는 양복점과 옷수선을 병행해서 하셨다.
내 기억엔 아버지는 훌륭한 양복점 주인이셨다.
지금도 그 실력은 남아 있어 장사 안되어 그냥 헐값에 판 옷수건 집을
아버지의 솜씨로 이제 알아주는 가계가 되었다 :)
어린 시절 기억이라면 좁은 작업실에서 미싱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12시
넘어서까지 일하시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이다.
- 그리고 10여년을 일해도 모른다고 어머니를 구박하는 아버지의 모습도 :)
어린시절 살던 성남동은 아이들이 살기엔 그리 좋은 환경은 아니었다.
집에서 불과 100m 떨어진 곳이 소위 홍등가 였고 그 시절의 기억은 영화
"창"에서 80년대 사창가 문화가 소개될때 80년대 사창가 근처에서 살았던 지
라 바로 저거야 할 정도로 생생하다.
- 80년대 사창가 문화는 소위 젓가락 두들기는 문화이다.
초등학교 다닐때 젓가락을 두들기며 돌아와오 부산항해를 불렀던게
나의 어릴적 모습이다. 흐흐...
초등학교 시절 담임선생님은 부모님께 애들 교육상 좋지 않으니 이사를
권했지만 장사때문에 부모님은 그곳을 떠나진 못했다.
뭐... 그런 환경에서도 나와 여동생은 별 다른 탈 없이 잘 컸다.
오히려 그곳에서 일찍부터 사회의 어두운 모습을 보면서 생각의 변화가
있었다고 할 수 있지.
내가 회사에서 스톡옵션을 받았을때 가장 먼저 집에 전화한건 바로
기뻐하실 어린시절 가난했지만 열심히 일하신 부모님의 모습이 떠올라서
였다.
후에 여동생을 통해 안 사실이지만 부모님은 3년후 내가 받은 주식의
액수를 계산하고 그 기대감에 며칠 동안 잠도 못잤다고한다.
그 기대가 과연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회사에서 제시하는 액수는 정말 꿈같은 거다.
적어도 부모님이 평생 모은 액수를 불과 3년후에 받을 수도 있으니 말야
허나 IT 쪽이 워낙 급변하다 보니 알순 없다.
3년후 회사 살아있으려나가 솔직한 나의 걱정이다.
내가 돈에 대해선 그리 욕심이 없는지라 3년후에 단돈 얼마라도 받게 되
어도 그리 상관은 없지만 집 짓는다고 빚에 쪼들려 있는 부모님을 생각하
면 그럴 수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열심히 일해야지...
스톡옵션은 주식을 팔 때까지 꼭 회사에 일하고 있어야 하니 난 일부를
팔수 있는 3년후 부터 100% 팔 수 있수 있는 6년후 까지 총 6년을 이 회사
에서 일해야 한다. 아직은 아득한것 같다.
싱글....
유달리 유머감각이 높은 아버지의 발상에서 나온 멋진 이름이 아닌가
생각된다
웃고 살아야지 ^^;
ps. 근데 지금 생각해본건데 싱글이란 이름 때문에 자식놈이 24년동안
싱글에서 못 벗어나는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