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처) 문화일기 173 결혼은 미친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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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혼은 미친 짓이다, 유화, 싸이더스, 2002, 영화, 한국

영화를 보기 전까지 나는 이러한 사랑 이야기는 이제 전혀 새로
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또한 그러기에 엄정화의 몸을 전
면에 내세운, 그저 그런 상업영화겠거니 생각했던 터다. 딴은 그럴
것이 여성의 자유로운 성풍속이나 가정주부의 탈선은 굳이 영화가
아니더라도 TV에서까지 쉽게 접할 수 있는, 이제는 흔해 빠진 일상
의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선입견이었다.
소재는 비록 식상했지만 박일문이 수상했던 오늘의 작가상 출신
원작답게 최근 내가 접했던 많은 다른 영화들과는 달리 영화는 스
토리에 힘이 있었고, 대화나 독백에서는 간간히 소설과 같은 여운
혹은 중의적인 깊이가 느껴져 왔다. 나는 보면 볼수록 매료되었고,
특히 그 결말처리에서는 흔해 빠진 싸구려 영화와 분명한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이미 결혼하여 아이까지 있는 원작가 이만교 씨가 감히 도발적으
로 말하는 제목, 결혼은 미친 짓이다! 영화는 이 시대의 결혼을 중
심으로 사랑과 가정의 의미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작가는 조금 뜨고 싶었던지 제목에 이어 인물과 초반 사건들도
도발적으로 만들어 낸다.

영화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중심을 이룬다.
한 여자를 영원히 사랑할 자신이 없고, 그러기에 거짓말을 할 수
없어 결혼하지 않는 준영과 사랑하는 사람과 연애하고, 조건 좋은
사람과 결혼하고 싶어하는 연희는 시대적 현실감은 상당하지만 바
람둥이 남자와 계산적인 여자란 그 내역들은 일반적으로 그닥 호감
가는 모습은 아니다.

게다가 그들이 처음 맞선으로 만나 여관까지 가는 설정은 사실
꽤나 작위적이긴 하다. 헌팅이나 부킹이 아닌 다음에야 이런저런
관계가 얽혀있는 소개팅, 심지어 더 권위 있을 맞선에서 그랬다는
건 얼마나 현실감 없는 이야기인지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
일 게다. --;

그러나 비현실적인 초반 구성과는 달리 인물 설정은 따지고 보면
아주 돋보였다.

누군가 내게 왜 일부일처제가 정당한가,라고 질문을 한다면 나는
그것에 대한 답변을 해낼 자신이 없다. 내가 모를 까닭에 의해 도
덕적으로, 관습적으로 일부일처제는 언젠가부터 이곳의 정의가 되
었고, 그것은 신도, 자연도 승인하지 않은 채로 사회질서가 되어버
렸다. 심지어 간통죄까지 두루 섭렵한 우리나라에서는 고운 정, 미
운 정까지 총 동원하여 이미 사랑이 끝난 배우자에 대한 영원한 사
랑을 강압해 놓기까지 했으니 말 다했다. 곧 준영은 이러한 영원한
사랑에 대한 회의, 또한 그것을 강압하고 있는 사회에 대한 영화의
첫 번째 시비다.

뿐만 아니라 결혼은 평생 함께 해야 할 의무가 없는 연애와는 분
명한 차이가 있을 것이고, 이 시대가 소녀적 감수성으로 무장한 사
랑지상주의자들의 천국도 아닐 것인데 결혼과 연애를 동일한 잣대
로 평가하여 그 상대방을 강압하고, 또 그렇지 못할 때에 좋지 않
은 시선을 보내는 사회라면 그것은 사회 문화의 잘못임이 분명하
다. 결혼에 있어서 사랑 또한 여러 조건의 한 가지이거나 혹은 역
으로 여러 조건들이 모여 하나의 사랑으로 넓게 해석되어야 함이
당연하다. 이것은 연희를 통한 조건적인 사랑에 대한 영화의 (의도
와 다른) 두 번째 시비다.

영화의 세 번째 시비는 사진을 통한 발견이었는데 이미 시간이
흐른 후에 연희가 차곡차곡 쌓아둔, 행복한 얼굴만이 가득한 사진
속에서 준영이 깨닫는 것은 아마도 가정의 의미였을 것이다. 그러
한 가정은 결혼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고, 준영은 결국 행복
한 사진을 통하여 결혼에 대한 애착을 찾아낸다. 연희 역시 사랑하
는 사람과의 삶과 조건 좋은 사람과의 삶 중에서 다시는 찾아가지
못할 것 같았던 준영을 끝내 찾아가고 마는데 이것은 영화가 사랑
하는 사람과의 결혼을 손 들어주는 일이었다. 그것은 미친 짓이고,
아무 의미 없는 짓이라고 그간 깎아내렸던 결혼에 대한 완전히 다
른 해석으로 영화는 결혼에 대해 시비를 걸고 평가절하 하면서도
준영처럼 결혼에 깊은 애착과 환상을 갖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모아둔 사진이 후에 깊은 의미가 되
는 모습, 그리고 너무 직설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포괄적이
지도 않게 연희가 준영을 찾아가는 그 순간 끝맺어지는 적당한 결
론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영화는 결혼에 대한 환상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
다. 연희의 결혼을 통해 이 시대의 결혼이 경제적 손익계산서를 바
탕으로 한 거래에 지나지 않다고 비난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연희의
사랑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결혼이 정말 미친 짓일 거라면 그것은 환상으로부터 벗어나지 못
해 결혼의 본질에 도달하지 못하기 때문이어야 한다. 결혼의 참의
미는 사랑하는 사람을 선택해 내는 것이 아니라 함께 평생을 살아
갈 한 사람을 골라내는 일이다. 그렇다면 연희의 다소 계산적인 모
습은 잘못이 될 수 없는 일이었다. 결혼에 있어서 사랑은 성격과
외모, 재산과 능력 등이 모두 응결된 보다 큰 의미이어야 한다.

연희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서 조건 좋은 사람과 결혼해서는 안
되었다. 결혼할 나이라서 결혼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고, 영화
또한 준영의 입을 통하여 똑같은 이야기를 한다. 이 사람, 너무나
도 결혼하고 싶어서 그래서 결혼하는 것은 정당하지만 지금은 결혼
할 때이기 때문에 결혼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연희는 좀더 마
음을 정리하여 결혼할 한 사람을 선택해야 했고, 그 사람을 사랑하
며 결혼했어야 옳다.

어린 제자의 사랑을 제대로 부각시키지 못해서 자유연애주의자인
준영의 모습을 적절하게 표현하지 못한 것은 영화의 또 다른 실수
가 되겠고, 준영와 연희의 옥탑방 생활의 행복한 모습, 그리고 그
들의 갈등이 사소한 콩나물비빔밥으로부터 시작되는 작은 장치들은
영화의 즐거움이 될 수 있겠다.

비록 구태의연한 결혼의 환상에 빠져 역설적으로 미친 짓이라고
말하는 결혼 영화였지만 나름대로 힘을 갖고 이야기를 전개한 모습
이 괜찮은 영화였다.


020505 00:00 식상한 소재, 짧은 성찰에도 불구하고 흥미로운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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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내용은 8,324일 전의 글로 현재의 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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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Written: 02/26/2009 00:56:26
Last Modified: 08/23/2021 11:46: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