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중학생 시절 해외펜팔을 많이 했던 적이 있다.
국적이나 성별, 연령, 신분을 가리지 않고 열렬히 펜팔을 했던 나는
당시 이런저런 펜팔 협회로부터 상을 받을 정도로 모범적인 펜팔 회원이었다.
나와 펜팔했던 사람들 중에는 비슷한 또래의 여자아이들도 물론 있었는데
고작해야 그제 막 태동기를 거치고 있던 PC통신이 전자화된 커뮤니케이션의 전부였던 그 시절
지금과 같이 화상채팅을 한다거나 이메일을 통해 즉시적이고 손쉽게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는 일은 쉽지만은 않은 상황이었다.
오랜 서신 교환을 통해 충분한 신뢰를 쌓은 이후
그제서야 사진을 요청하고,
그리고 상대방이 그 요청을 받아들여 승낙한다면
또다시 항공우편으로 다소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상대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던 것이다.
게다가 그렇게 온 사진들은 아주 어렸을 적 사진인 경우도 많아
나와 친근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이 상대방의 현재 모습을 감안하고,
또한 그것을 토대로 이성으로서 느끼기엔 어쨌든 난관이 많던 시절이었다.
2.
나는 PC통신의 1세대이기도 했다.
KETEL과 PC Serve라는 양대산맥이 소수 마니아적인 PC통신 시장을 형성해 나가던 그 시절
나 역시도 그 신 문명의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전문가나 혹은 소수의 대학생이 주 활동원이던 그 무렵에는
중학생 신분이었던 내가 나에 맞는 이성을 PC통신을 통해 만나기엔 어려움이 있었다.
물론 당시 나는 이성보다는 게임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기도 했거니와
또 그 시절의 PC통신 문화에 지금의 번개팅과 같은 것은 들어있지 않기도 했다.
내가 대학생이 되고 나서야 PC통신은 보다 대중적이 되기 시작했는데
그제서야 나는 PC통신을 통해 이성과 접선할 수 있는 많은 계기를 가질 수 있었다.
이 시절에는 과거 펜팔 시절보다는 훨씬 더 나은 면이 있었다.
서신을 교환하는 데 몇 달의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고,
교류하고 싶은 새로운 상대를 얼마든지 쉽게 맞춤형으로 찾아낼 수도 있었다.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는 것 역시 이전보다는 훨씬 수월해 졌다.
화상캠과 디카가 보급되기 시작했고,
또 스캐너를 통해 일반 사진을 디지털파일로 변환시키는 것도 어려운 일만은 아니었다.
다만 모든 상대가 이러한 신 문명에 밝은 것만은 아니라는 문제가 남아있기도 했다.
따라서 때로는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후에 좋은 감정을 유지할 수도 있었지만
또 때로는 상대의 얼굴을 모른 채 좋은 감정을 유지하다가 직접 만나 얼굴을 확인하기도 했다.
물론 시간이 갈수록 바로 만나 직접 서로를 확인하는 경우가 많아지기도 했지만.
3.
지금은 2005년이다.
펜팔을 했던 90년대 초반도, 번개팅을 했던 90년대 후반도 모두 아련한 과거로 밀어버린 시기다.
전 세계를 하나로 엮는 인터넷은 손 뻗으면 바로 닿을 만큼 삶, 아주 가까이에 있으며,
휴대폰으로 대표되는 무선인터넷을 통해 상시적인 교류도 활발하다.
이런 상황에서
서로의 얼굴을 알지 못한 채
말과 글로서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게 도대체 가능하기는 한 일인가.
첨단 테크놀로지가 난무하는 이 상황에서 고전적이고 전통적인 방식으로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4.
물론 이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해결해야 할 아주 어려운 문제가 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데 외적인 요소가 얼마만큼의 영향력을 갖는가,라는 게 그것이다.
다시 말해 상대가 얼마나 아름답냐, 또는 추악하냐에 상관 없이
내적인 것, 이를테면 성격이나 말투, 생각이나 사상 등만으로도 진정한 사랑이 가능하냐, 라는 것이다.
가능하냐?
5.
선결해야할 문제는 너무나도 어렵고, 또 너무나도 식상하기에
그냥 놔둔 채로 현재의 문제만을 생각해 본다.
2005년,
서로의 얼굴을 알지 못한 채
말과 글로서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게 도대체 가능하기는 한 일인가.
가능하냐?
- achor WEbs. ac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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