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당에 발을 디디며... (2009-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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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hor ( Hit: 1830 Vote: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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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종교를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내 삶에 있어서 종교는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종교, 그 본연의 가치로서가 아니라
세뇌의 잘못된 형태로서 깨트려야할 공격의 대상으로서였다.

종교, 그 중에서도 특히 일부 개신교, 개신교도가 갖고 있는 보수성, 배타성, 비논리성을 타파하고 싶어했었고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종교이기에 비이성적이고, 맹목적일 수밖에 없겠거니 하며 이해하려는 자세를 취하기도 했었다.

신은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은 채
근거가 없기에 예측 불가능한 영역, 그 자체로 내버려 두면서도

스스로 자신이 신의 대체자, 신의 아들 등으로
같은 인간임에도 자신을 신성시 하는 자들을 인정하지 못했었다.

개신교나 천주교, 이슬람교뿐만 아니라 증산도, 대순진리교,
혹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사이비 종교까지도
대개의 종교는 신 자체가 아니라 신을 대행하려는 한 인간이 반드시 존재하고 있었고,
이들의 세계관, 가치관, 율법 등의 차이는 있었지만
인간이 신의 뜻에 따라 다른 이들을 구원하러 왔고,
언젠가 세상은 심판을 받는다는 그 근본적인 구조의 차이는 느껴지지 않았다.

이런 생각은 내게 있어서 너무도 확고하였기에
이것이 내게는 일종의 종교와 다름 없었다.
신 혹은 신의 아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확고해 진다면
그것 또한 또다른 종교가 될 수 있었던 게다.


곧 내가 성당을 찾은 것은
어떤 면에서도 자발적이지 않았다.

신부는 순순히 용인한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강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나온 이들도 있겠지만 이들 또한 신의 초대다"
꿈보다 해몽이 좋은 격이지만
그래도 솔직한 심정을 이해해 주니 위안은 된다.

세례를 받기 위한 첫 과정은 시작되었으나
나는 여전히 천주교와 뜻을 달리 한다.

그럼에도 이런 나조차도 환영한다면,
그리고 세례를 받는 것이 혼전의 약속이자 가정의 평화를 위한 필연이라면
할 수밖에.

무엇보다 중요할 인간의 신념이 아무렇지도 않게 강요받을 수 있는 이 사회에 유감이다.

그래도 그나마 상대적으로 너그러운 천주교라서 다행이란 생각은 해본다.


아래는 1996년 4월 14일 이화여대 이경숙 교수의 글이다.
전도를 강요하는 개신교도들이 한 번 읽어봤으면 싶다.


◎ No, 14
◎ 이름: 이경숙 교수
◎ 2002/1/16(수) 22:43 (MSIE5.5) 211.177.20.247 800x600
◎ 조회: 91

[1996.4.14] "야훼만으로"

성서본문: 출애굽기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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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화여대에서 필수 교양과목 중에 하나인 '기독교와 세계'라는 과목을 오랫동안 가르치고 있습니다. 원래 이 과목은 '기독교 문학'이라는 명칭을 가지고 있었는데 최근에 '기독교와 세계'라고 과목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이 과목은 대개 1학년 때 필수과목으로 택하게 되는데 기독교인이건 아니건 모든 학생들이 들어야 하기 때문에 학생들의 거부감도 있고 해서 가르치기가 그다지 쉽지 않습니다. 저는 매 학기 첫 시간에 학생들에게 평소에 기독교에 대해 질문하고 싶었던 사항, 궁금했던 바 혹은 비판하고 싶은 점들을 써내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 학기 동안 대충 어떤 문제들을 다루고 접근해야 할 것인가를 파악하게 됩니다. 이번 학기에 제가 맡은 반 학생들의 질문을 대강 요약해서 소개해 본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카톨릭과 기독교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② 왜 기독교에는 그렇게 교파가 많으며, 이단은 무엇이고 정통은 무엇입니까? ③ 길에서 학교에서 전철에서 예수를 믿으라고 강요하면서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고 천당에 간다고 하는데 우리는 도저히 믿을 수 없습니다. 교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④ 한국에 기독교가 전래되기 이전에 돌아가신 우리 조상들은 모두 지옥에 가셨습니까? 그렇다면 석가나 공자나 간디도 모두 지옥에 갔습니까? 그밖에 기독교와 제사, 뉴에이지 운동, 윤리적 도덕성 문제 등, 학생들의 이러한 질문들의 배후에는 모두 기독교의 배타성 요구 즉 기독교만이 유일한 절대적 진리를 담고 있다는 전제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학생들은 친구들과 기독교에 대해 토론을 하고 싶어도 기독교는 인본주의가 아니라 신본주의이기 때문에 무조건적으로 믿어야 한다고 해서 말이 안통하고 답답하다고 하소연하기도 합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기독교의 이러한 태도가 기독교와 한국 사회에 얼마나 누가 되고 짐이 되는지 익히 잘 알고 계시리라고 짐작됩니다. 현재 한국사회에서 기독교는 대학 1-2학년 학생들에게는 이상한 종교로 인식되고 있으며 뿐만 아니라 많은 심리적 부담감을 주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이성과 상식을 벗어나는 무조건적인 종교이며 이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가고 구원받지 못한다는 압박감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의 글 속에는 혹시 지옥에 가게 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불안감을 읽어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우리 사회에서 왜 기독교가 이렇게 절대적이고 배타적이고 맹목적인 종교로 인식되게 되었는지에 대해 여러분들과 잠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날 많은 현대인들 지식인들이 이렇게 '근본주의적', '보수주의적' 신앙의 태도를 갖고 있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고 또 이런 현상은 충분히 설명이 가능한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 너무나 복잡하고 다양해서 사람들이 모두 숨을 쉴 여유조차 없이 급히 살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들 지쳐있다는 사실에서 그 일차적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소위 성공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가정에서 직장에서 원만한 친 인척 관계, 인간관계를 가져야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늘 경조사에 참석해야 하고, 또 직업적으로는 전문성을 계속 유지해야 하고, 이밖에 경제력을 키우기 위해 이사도 몇 번 잘 해야하고, 아이들에게 과외공부를 시키고, 특기를 살려주어야 하고, 컴퓨터를 자주 갈아가며 배워야 하고, 피곤한 몸을 보살피기 위해 운동도 해야하고, 건강관리도 해야하는 등 매일 바쁘게 뛰고 있으니까 현대인들은 대부분 만성적 피로에 젖어 있습니다. 그런데 또 이렇게 빽빽한 일정과 피곤한 상태에 익숙해 있으니까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혹시 생긴다해도 이를 견디지 못하고 또 무엇인가를 해야할 것 같은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따라서 일요일이 되어 교회를 찾는 사람은 확실한 구원의 보장과 단순논리로 쉽게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교회만을 선호하게 됩니다. 쉽게 확신을 주고 단순한 교리만을 강조하는 교회들이 날로 성장하고 부흥하는 것은 모두 이런 이유에서일 것입니다. 이차적 원인으로는 세상이 너무 급변하고 까딱 잘못하면 10년 20년 처진다는 상황 때문에 우리 현대인들이 무언지 확실하고 분명하고 절대로 변치 않는 영역을 갖게 되기를 희구하는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종교적 영역에서 이런 불변의 만족을 얻으려고 추구하고 있습니다. 이 불변의 절대진리의 영역을 확보하고자 기독교인들은 철저한 배타성, 다른 모든 이론들을 무시하고 정리하는 태도를 갖게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사회학적 측면에서의 설명과 함께 오늘 우리는 성서 자체가 말하고 있는 배타성 및 절대성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구약성서에서 야훼숭배를 가장 분명하게 배타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곳은 십계명의 첫 부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오늘 읽은 출애굽기 20장 1-6절에는 배타적이고 질투하는 야훼 하나님의 품성을 아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1계명은 다른 신들을 섬기지 못한다고 되어 있고 제2계명은 땅, 땅 아래, 땅 위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 떠 우상을 만들지 못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제1계명의 내용은 비교적 분명합니다. "야훼만을" 믿고 다른 이방 신들은 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2계명의 내용은 조금 복잡합니다. 여기서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했는데 그 우상이 야훼의 형상인지 다른 신들의 형상인지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제1계명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말고 제2계명에서 다른 신들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지만 사실 제2계명은 야훼 하나님 형상제조 금지 명령입니다. 이 사실은 히브리어 본문을 보면 매우 분명합니다. 야훼의 형상을 인간이 세상에 있는 피조물과 비슷하게 제조해서 세워 놓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제2계명은 제1계명보다 훨씬 더 오래된 계명이고 또 야훼 종교의 특징을 훨씬 더 잘 말해주는 계명입니다. 다른 민족들은 다른 신들을 섬기며 신들의 형상을 만드는데 너희들은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명령과 구약성서 전반에 나타나는 "야훼를 보면 죽으리라"는 사고는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또 야훼 하나님이 시각의 하나님이 아니고 청각의 하나님이라는 사고와도 서로 통합니다. 이러한 사고는 야훼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인간의 작품이 결코 될 수 없다는 점을 천명하는 것입니다. 야훼가 인간을 만드셨지 인간이 야훼를 만들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은 인간의 작품 속에 갇힐 수가 없는 자유로운 초월자이시고 창조주이시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고가 야훼 종교를 다른 종교와는 다르게 발전시켰고 또 이스라엘의 종교성을 매우 높고 독특한 경지로 승화시키게 되었다고들 보고 있습니다.

제1계명과 제2계명에서 중요한 점은 이 계명들이 모두 "너희" 즉 "이스라엘"에게 한 요구들이라는 점입니다: "이스라엘, 나는 너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었고. . ." 십계명의 1, 2계명은 하나님은 야훼뿐이시라는 유일신론을 천명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애굽의 태양신, 바빌론의 월신, 일원성신들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다른 신들을 믿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너희" 즉 "이스라엘"이 다른 신들을 믿는 것이 문제입니다. 야훼 명령의 대상은 철두철미 이스라엘입니다. 이렇게 보면 십계명의 사고는 유일신론이 아니고 단일신론적임이 분명합니다. 여기서는 다른 민족들이 다른 신들을 섬기고 다른 관습으로 믿는 것은 당연히 전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주관하시고 관리하시는 야훼 한분이시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기독교인들이 야훼하나님 대신에 돈이나 권력, 성, 향락 등을 하나님(우상)으로 섬기는 것이 문제라고 합니다.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구절에 의거해서 다른 종교를 무시하거나 정리할 수 없습니다. 이 계명의 대상은 이스라엘이지 다른 종교인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본래 단일신론자들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유일신론자들이 되는데 그것은 이스라엘이 나라를 빼앗기고 유배생활을 하게 되었을 때 "위기에 처해서" "생존의 방법으로" 유일신론을 갖게 됩니다. 주로 기원전 530년경 제2이사야 시대에 유일신론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는 바빌론의 속국이 된 상황에서 바빌론의 운명도 결국은 야훼 하나님이 좌우하신다는 생각에서 나온 사고입니다. "바빌론과 페르시아도 결국 우리 하나님이 지배하신다", "곧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바빌론과 페르시아를 꺾어 우리를 구원하신다"고 믿으면서 야훼만이 유일한 하나님이시고 세계 모든 민족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였기 때문입니다. 소멸의 위기에 처해서, 단일신론적 사고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에서 자신들을 붙잡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이스라엘은 유일신론적 신관을 확립한 것입니다. "야훼만을" 강조한 것은 생존의 목표가 있는 것이지 로마시대처럼 제국주의적 정복에 목표가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이런 성서 구절을 이런 배경을 생각하지 않고 일반 진리로 비 기독교인들에게 억압적으로 강요하는 것은 커다란 문제점을 지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은 신약성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약성서에 나타나는 배타적 성서구절을 보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5-6), "사람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이름은 이 이름밖에는 없습니다."(사도행전 4:11-12) 등으로 모두 "예수만으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이 구절들이 모두 그 당시 예수 신앙공동체가 겪지 않으면 안 되는 고투를 증언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들 구절에서 "오직" ". . .만으로"를 강조하고 있는 것은 미약하고 보잘것없는 집단인 기독교 공동체가 커다란 유대교 집단으로부터 위협받고 있을 때 기독교인들은 십자가에 못 박혔으나 부활하신 예수에 대한 신앙을 정당화하면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하여 "예수만으로"를 강조했던 것입니다.

성서는 신앙의 표현입니다. "선택받았다", "구원받았다", "야훼만으로", "예수만으로"라는 말은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위한 신앙적 표현이지 우리가 다른 종교인들에게 강요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닙니다. 성서의 내용은 객관적 진리를 서술해내려는 시도가 아니라 자신을 이해하고 하나님을 이해하려는 생명을 건 노력이기 때문입니다. 배타적 성서구절들에서 우리는 공격적 전투태세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누구인가는 알아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야훼만을" 믿는 것은 내 속의 모든 우상들을 버리고 해방과 사랑의 야훼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자각은 우리를 해방시켜주고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서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과 대화할 수 있는 자세를 갖게 해 줍니다. 우리는 공격적이거나 강매하는 태도를 가질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의 신앙의 내용을 겸허하게 나누어 가질 뿐입니다. 기독교인은 무엇인가를 주장하고 관철하도록 부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를 개방하고 남을 향하여 헌신하도록 부름 받은 존재들입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제국주의적 공격적 신앙태도를 가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지상에 실현시키는 자들로서의 개방적이고 포용적이고 헌신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 공동체가 왜 "예수만을" 구세주로 받아들였는지, 그것이 십자군적인 전투적 태도였는지를 되새겨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남을 거부하기보다는 거부당하는 편을 택하신 분이 아닙니까? 부디 우리 기독교인들도 겸손해지고, 자신이 정말 "야훼만을" 또 "예수만을" 믿고, 사랑과 희생과 열려 있는 자세로 세상과 대화할 수 있는가를 성찰할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 ac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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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Written: 09/27/2001 13:51:56
Last Modified: 09/06/2021 17:5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