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사사 게시판』 34135번
제 목:(아처) 끄적끄적 76 삶
올린이:achor (권아처 ) 99/09/05 00:19 읽음: 51 관련자료 있음(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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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잠잠했었는데 또다시 내 어깨를 짓누르기 시작한
다. 무언가 해야한다는 억압, 이대로 그냥 있을 수 없다는
불안감,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다는 초조...
오랜만에 주말을 집에서 보냈다. 주말을 집에서 보내는 건
너무나도 오래되어 다이어리에서 도무지 찾을 수 없고, 주말
밤거리를 싸돌아다니지 않은 건 2달이 넘었나 보다. 그러고
보면 그간 난 정말 정신없이 헤매고 다닌 듯 하다.
용가리를 보다 학원에 가서 보충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
오니 17시 무렵. 한숨 낮잠을 하고 일어나 박찬호의 9승을
재방송으로 보며 또 잠들었다. 북적대는 소리에 깨어나 보니
부모님 친구분들이 몰려오셔서 집안을 온통 난장판으로 만들
고 계셨다. 짜증이 났다. 오랜만에 집에서 쉬어볼까 하고 있
는데 이건 쉬기는커녕 스트레스만 쌓이게 했다.
친구분들이 가신 후 집안은 온통 유학 얘기다. 무슨 장학
금으로 일본에 간다며 직설적이지는 않았지만 내 부모님께서
는 언뜻 내게 눈총을 주곤 하셨다. 어쩌면 내 자격지심일지
도 모르겠지만.
가만히 물어오신다. 넌 무엇을 할거냐고.
난 대답한다. 전 더이상 공부할 생각이 없으니 자식이 공
부로 명성을 얻는 꿈을 아직도 꾸신다면 이젠 포기하시는 게
나으실 겝니다.
다시 물어오신다. 그럼 무엇을 할거니?
할 말이 없다. 벌써 23이란 나이임에도 내 미래에 아직까
지 아무 준비도 해놓은 게 없다.
사실 내가 가장 하고 싶은 건 음악이다. 인기가수보다는
매니아를 몰고 다니는 가수가 되고 싶은데 그게 내게 있어서
얼마나 불가능한 일인지는 나도 알고 있기에 단순히 7살 먹
은 꼬마의 꿈만큼만 바라고 있다. 그리하여 대안을 객원가수
를 쓰는 작곡, 작사가로 잡았지만 이 역시 내 능력과 적성으
론 무리다.
처음 내가 경제학과를 택한 까닭은 고등학교 시절 경제를
좋아했던 이유도 있겠지만 외환딜러라든가 컨설턴트, 또 그
시절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모의주식 등을 하면서 꿈꿔왔
던 펀드매니저 같은 직업들이 정말 멋있어 보였던 이유가 가
장 크다. 고등학생 시절은 지금보다도 더욱 미숙했기에 영화
속에서나 멋있게 나오는, 누구보다도 바쁜 Newyorker를 동경
했었다.
아직 이 환상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다. 그러기에 여전
히 가끔 꿈꾸기도 하지만 내 능력을 배제하고 전적으로 내가
그런 사람이 된다는 가정을 하여도 썩 내키는 건 또 아니다.
내 삶을 일에 모조리 받치고 싶지는 않다. 창조의 조건은 널
널함이라고 굳게 믿는다. 생활에 바쁜 사람은 결코 기발한
아이디어를 낼 수 없을 거라 본다.
결국 처음으로 돌아가게 되는 게다. 또 그게 비참한 일이
고. 아무리 강태공이나 한명회를 상기하며 조급해지지 않으
려 해도 나를 제외하고 세상이 너무 빨리 돌아가는 것 같아
어쩔 수가 없다.
한양대가 싫다. 왠지 한양대는 기업에 유능한 사원을 만들
어내는 공장 같은 느낌이 들어 싫다. 대학은 그래서는 안된
다고 생각한다. 대학은 순수한 학문에의 정진만이 길이어야
하고, 열정으로 가득 찬 젊은이 특유의 맹목적인 투지가 있
어야할 것 같은데 요즘 대학은 전혀 그렇지 않아 싫다. 또
요즘 대학생들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전근대적인 고시에 미
쳐있는 사람이나 새로운 물결에 뒤지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
듯 구태의연한 사회 속으로 뛰어들고자 적극적인 대학생들,
그들이 싫다. 대학생답지 않은 양아치들도 싫고, 편견과 자
기애로 가득찬 속물들도 싫다.
그런데 그게 나다. 그래서 변명하게 된다. 대학을 졸업하
면 바로 사회에 진출하게 되는 것인데 대학은 꼭 순수학문만
을 탐구해야 한다면 이론과 실전이 따로 노는 무의미한 일이
아닌가! 90년대, 이미 문화는 다양화, 세분화되었는데 이에
무조건적인 반발을 일삼는 짓이야말로 시대적 흐름에 대응하
지 못한 자의 구차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아, 사내아이는 변명을 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렇게 변명
을 늘어놓고 있는 꼴이라니, 젠장, 나도 정신이 어지간히 나
가긴 나갔나 보군.
이 시대에 적합하게 살아가는 건 참 힘든 일인 것 같다.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꿈꾸고 무엇을 준비해
야하는지 모르겠다. 미래에 대해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한
23이란 나이는 슬프도록 초조하기만 하다.
아마도 이토록 구차하게 내가 불안해하는 까닭은 나 역시
속물근성, 다시 말해 사회를 향한 준비를 이미 많이 해놓은
사람을 욕하면서도 나 역시 그렇게 살아가고 싶은 마음, 곧
질투심을 갖고 있기 때문일 터인데 욕심을 버려야지, 버려야
지 하면서도 성인이 아닌 이상 쉬운 일은 아니다.
초연해지고 싶다.
무엇에도 연연해하지 않고 내가 하고픈 대로 살아가고 싶
다.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지닌 철인이 되고 싶다.
내 생각이 완벽해지길 바란다...
98-9220340 건아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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