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실 문제는 내게만 있는 건 아니다.
진정한 진실은 리2에 적극적인 여성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미 잠시나마 했었던 리1에서
그 기대심이 얼마나 큰 실망감으로 돌변할 수 있는 지 겪은 바 있기에
게임 내에서 사랑을 찾을 생각은 결코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건만
그 수많은 여성들의 물결 앞에 평정심을 유지하기란 쉬운 일만은 아닌 것이다.
2.
파티플레이를 경외시 해온 내가 완전한 파티플레이어가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이야기는 아니었다.
와우의 열풍 속에 지난 11월 초 혈원들이 그 폭풍 속으로 사라졌을 때
홀로 남은 내겐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나는 지난 1년 간 모나 다른 혈원들과 주로 사냥을 해왔던 방식을 버린 채
완벽히 개인적인 한 플레이어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파티플레이를 하다보면 필연적으로 사람들과 알게 된다.
설령 게임 속에서 이런저런 사람들과 알고 지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나라 할 지라도
어제 본 사람을 오늘 또 본다면 인사하는 것을 피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렇게 시간이 축적되어 갈수록 안면 있는 사람들은 늘어나게 되고,
필연적으로 나는 이 거대한 리2 커뮤니티 속에서 복잡하게 연관된 네트웍의 한 축에 소속될 수밖에 없다.
나는 지난 한 달 남짓의 시간동안
파티플레이를 하면서 사람들을 알게 되었다.
3.
다시금 이야기 하는 것이지만
나는 리2를 하며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고 싶다는 소망을 전혀 갖고 있지 않을 뿐더러
그것이 여성이라 하더라도 별 관심이 없는 일이었다.
나는 정말이지
그냥 조용하게 내 여가시간을 즐기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러기에 초등학생 시절이었던 10대 초반 무렵
처음으로 컴퓨터 게임을 접한 이후
내가 개인적인 관계로 내 연락처를 가르쳐 준 것은 최초의 일이었다.
물론 혈원이라던가 혹은 다른 집단적인 관계 속에서의 교류는 전혀 없던 게 아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아닌 집단에 관계된 이유였던 것이다.
곧 이것을 변명으로 늘어놓는 것이냐고 내게 묻는다면
그렇다고 말해야 할 것도 같다.
4.
그녀는 먼저 내 연락처를 물어 왔다.
그녀는 자신의 연락처를 묻지 않는 것에 다소간의 이상하단 생각을 갖고 있던 모양이었다.
나는 좀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연락처를 가르쳐 주어 그녀가 내게 연락을 해온다 하더라도
전화통화나 문자 교류를 그닥 좋아하지 않는 내가
그녀에게 연락을 할 리는 거의 없을 게 분명하고,
그렇다면 그녀는 내 연락처를 모르던 시절보다 더 내게 실망할 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많이 고민할 수는 없는 일이다.
연락처를 물어온 그녀에게 바로 답변을 주지 않는다면
내가 주저하고 있다는 걸 눈치 채곤 그녀가 가슴 아파할 지 모른다.
조금이나마.
5.
밤새 몸빵을 하고 난 후 인사를 하고 파티를 떠난다.
좀 피곤함이 느껴지지만 뭐 이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한다.
오늘 사냥도 화끈했다며 스스로 만족한다.
그 때 대화창 오른편에
예, 아니오, 너무도 단편적으로 묻는 창이 하나 뜬다.
파티에서 힐러였던 사람이
나를 친구 초대하던 것이었다.
24살의 여성이라고 밝혔던 그녀와의 안면은
이번이 처음 있던 일이었다.
같이 파티를 하며 일상적인 대화는 좀 나눴긴 했지만
사적인 이야기나 질퍽한 농담은 없었기에 좀 이례적인 일이긴 했다.
뭐 친구 정도라면 귀찮을 일도 별로 없으니 간단하게 수락한다.
그녀는 귓말로 ㄳㄳ 라고 보내온다.
6.
클로니클1 시절의 막판에도 나는 파티플레이를 했었다.
그 시절에는 대안이 없었다.
사냥터는 부족했고, 사람들은 많았으며, 솔로잉이나 1:1 사냥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시절이었다.
그 시절 알게 된 한 사람은
자신이 만렙을 찍으면 내게 한 턱을 쏘겠다고 약속을 했었다.
나는 그녀가 물어보는 무언가에 답변을 해주었는데
고맙다는 게 그 이유였다.
며칠 전 그녀는 만렙을 찍었다며 내게 귓말을 해왔다.
약속대로 밥을 한 끼 쏘겠단다.
뭘 먹고 싶냐고 묻기에 나는 가장 맛있는 걸 쏘라고 대답한다.
그녀는 뭐 이상한 요리 이름을 이야기 한 후에
그것이 아주 맛있으며, 한 호텔의 식당에서 판다고 말을 이었다.
남녀 사이의 대화 속에서,
특히 좀 가볍게 느껴지는 리2 남녀 사이의 대화 속에서 호텔이란 단어는
때로는 중의적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저 그러라고 답변을 해준다.
7.
얼마 전 트로이,란 영화를 본 적이 있다.
그 속에서 아킬레스는 유능한 전사이지만 가벼운 싸움을 경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나는 알고 있다.
그것은 스스로 대단한 영웅이라는 착각에서 비롯된 오만함의 한 단면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는 스스로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러기에 그런 자신이 뭇 사람들의 난투 속에 포함되고 싶지 않던 것이었다.
특별한 자신은 특별하게 행동하고, 특별한 전투에서만 기량을 발휘해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내 자신이 그러한 아킬레스와 같은 착각 속에
오만한 영웅 흉내를 내려는 건 결코 아니다.
나는 내가 무죄라며, 나의 순결과 나의 결백과 나의 건실함을 이야기 하려는 건 아니다.
나는 아직 정열과 열정이 살아 숨쉬는
건강한 이 땅의 청년인 데다가
얼마 남진 않았지만 그래도 아직은 20대의 팔팔 끓는 청춘인 것이다.
다만 리2.
이 속에는 꿈꾼다면 이루어질 수 있는
많은 유혹과 욕망들이 도사리고 있음을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