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색이 웹 에이전시에서 친구들과 함께 굴렀다는 사람이, 간단한 Coding 이외엔 도무지 할 줄 아는 것이 없다. 그나마 얼마 전부터 유게둘 수정작업은 나름 하고 있지만, 그것도 어떤 구조의 알고리즘을 이해하고 수정한다기보다는 최소한의 구조만을 파악한 채 대충, 그럭저럭 땜빵에 땜빵을 거듭하고 있는 것일 뿐. Monorail처럼 차라리 웹 에디터라도 굉장히 잘 쓰는 것도 아니고, achor, satag나 다른 이들처럼 프로그래밍에 능한 것도 아니다.
솔직히 관심은 있으나 바쁘다. 하루에 화장실 세 번도 가기 어렵다. 열 시간 가까이 모니터 앞에 앉아서 여러 가지를 만들고, 고치고, 숫자를 확인하고 또 확인한다. 저녁 때나 주말에 일이라도 있을 것 같으면 집에서 수정하는 것도 만만한 일이 아니다. 솔직히 질린다. 고치는 게 복잡하면 복잡할수록, 나는 피곤해진다. 그렇다고 남들처럼 무슨 디자인 뽀다구 나게 만들고도 싶지만, 내 공력은 그 수준이 못 된다. 그냥 편하게 만들어서 적당히 수정해 쓸 뿐이다. 처음 achor가 플랫폼을 빌려줘서 만들었고, 그 다음엔 satag. 나는 내 홈피를 스스로 만들어본 것이 얼마 안 된다. 지금 있는 홈페이지도 내가 만든 것이긴 하지만, 색상이나 detail에는 satag의 손길이 꽤 많이 묻어있는 그런 공간이다.
0 선생의 글을 읽으면서 문득 처음 아라비아제이션을 활용해 만들었던 홈페이지가 생각났다. satag는 당시 아랍식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글자가 흐르게 하는 것이 웹에서는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결국 vluez가 알려준 사이트에서, 그 방법을 찾아냈더랬다. 그 시절, "프로그램적이던, 태그적이던, 원론적으로는 불가능할 것이 없다"는 어느 프로그래머의 말을 참 많이도 읊조렸던 것 같고, 한편으로는 그래서 유일하게 satag에 대해서 내가 할 수 있는 내 자랑이란 고작 그 태그 하나를 찾아냈더라는 사실이었다.
사실 지금이야 싸이가 널리 알려져 있긴 하지만, 당시만 해도 홈페이지의 구조는 대부분 역 ㄱ자가 대부분이었다. 그런 평범함만은 어떻게 탈피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생각했던 것이 al jazeera 사이트에서 발견했던 아랍식 홈페이지였던 것. 지금의 유게둘 메뉴가 오른쪽에 와 있게 된 것도 사실은 그 때의 발견에서 기인한 것으로 알고 있다. 별다른 이유라기보다는, 그냥 익숙했으니까.
흥미로운 것은 지금 싸이월드가 바로 그 오른쪽 메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생각해보면 오른쪽 메뉴란 현실계에서의 책갈피를 염두에 두고 만들었지 않았겠느냐 싶은 것. 서울대 공대 사람들이 알 자지라나 아랍 사이트를 그렇게 많이 돌지는 않았을테니 말이다. 그러나 어쨌든 처음 기원한 방식은 다르나 추구하는 방향은 같다. 그래서 세상은 재미있고, 또한 그래서 발명에 특허제가 들어가고 특허와 관련한 분쟁이 잦은 것도 그 때문인 것 같다. 어차피 사람 생각이야 비슷할테니.
나 또한 0선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 역시도 홈페이지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싸이월드와 같은 훌륭한 구성을 꽤나 오랫동안 무시해왔다. 물론 나는 이유가 다소 달랐다. 게시판에 썼던 것처럼, 나는 너무나 개인적인 이야기들이 싸이를 통해 무절제하게 공유되는 것이 싫었다.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다만, CJ 인터넷의 'MYM' case와 같이, 업체의 정책에 따라 얼마든지 존폐가 결정될 수 있는 상업적 Tool로써의 싸이월드에 내 소중한, 피땀어린 데이터를 넣어놓고 관리한다는 것은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니 말이다. 그나마 웹 호스팅의 경우 호스팅 데이터를 다운로드 받아 다른 호스팅 서비스에 업로드해서 복구할 길이라도 있겠지만, 싸이의 경우 "누군가가 나서서 플랫폼을 맞춰주지 않으면" 그것이 불가능하다. 나우누리에 대한 안 좋은 추억 때문이라도, 그것만을 바라보고 싶지 않다는 게다.
연봉 3,000을 받는 직딩들이 더 개혁적이고 더 치열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이 밥벌이를 하기 때문이다. 밥벌이를 하는 이들은 항상 현실과 타협해야 하고, 현실과 싸워야 한다. 공허한 구호를 외치기 앞서 실현 가능성을 고민하고, 돈과 가족, 그리고 친구들을 희생하기 전에 치열하게 고민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혹자는 체 게바라가 어쩌구 모택동이 어쩌구 로자 룩셈부르크가 어쩌구 하는데, 우스운 말씀이시다. 정작 그런 말 지껄이던 인걸들은 그런 자리가 생기면 안온을 위해 숨어버릴 것을.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말라던 말은 참이다. 그 일이 공부든, 일이든, 사랑이든, 무엇이든 좋다. 시작했으면 최선을 다 해서, 앗싸리 올인하는 게 내 스타일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사랑에 있어서만큼은 지극히 리버럴하면서도 또 보수적으로 재고 또 잰다. 그러나 또한 당연한 말씀이다. 사랑은 둘이서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집안 문제를 따져야 하고, 종교 문제를 따져야 하고, 금전문제를 따져야 하며, 육아문제를 따져야 한다. 그게 현실이다. 그것을 고려하면서 사랑하는 것이 죄라면 나는 유죄다. 그러나, 정작 궁극적으로, 사랑만으로 밥먹고 살 수 있는 건 아니다. 그건 불변이다.
마케팅전략팀 Assistant Brand Manager. 아무도 돌보지 않는 상표업무 Back-up부터 전략 수립업무 지원을 위한 다양한 자료 수집, 분석, PPT Production에 Database 구축까지, 재고 또 재야만 하는 일의 연속이다. 비용도 비싸면 깎아야 하고, 보고서의 조그마한 숫자 차이에도 엄청난 지적과 잔소리, 그리고 불호령이 떨어지기 마련. 실무진인 우리는 지나치게 예민할 정도로 숫자를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본다. 그래야 산다. 치밀하지 못하면 우리는 죽는다.
일만 그런가? 집에서는 또 어떤가? 한 달에 한 번 있는 전기료 계산부터 각종 공과금 분배, 월세 정산, 각종 집수리 및 집안 관리에 이르기까지. 지금이야 아버지가 쉬시니까 그렇다지만 신경쓰지 않을 곳이 단 한 군데도 없다. 조금만 허술하면 세금도 제멋대로 더 나와서 세무서에서 큰 소리내고 싸워야만 한다. 세상은 항상 나에게 치밀함과 철저함, 꼼꼼함을 요구한다.
너무 노인네같은 발상이 아니냐고?
단순히 부모님의 연배가 높고 학력수준이나 생활수준이 다른 친구들보다 낮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브랜드 신발, 브랜드 옷이 아니라고, 남들보다 나를 가꾸는 데 그닥 소홀하다는 이유로 주변에서 무시하는 게 싫었고, 단지 영어, 수학 두 과목 점수가 낮을 뿐인데 중간으로 취급받고 무시받는 게 싫었을 뿐이다. 좀더 일찍, 좀더 좋은 학원을 다녔다는 이유로,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잡것들" 취급을 하는 친구들이 미웠을 따름이었다.
공부가 좋았다. 재미있었다.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공부를 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대학에서의 4년 반동안의 시간은 내게 가르쳐주었다. 남들이 알지 못하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곳을 긁어내는 시원함, 그리고 그것을 학문적 hierarchy로 풀어내는 재미와 통쾌함. 공부는 내 천직이라는 생각을 그 때부터 항상 품 속에 담고 살았다.
하지만 그냥 책이나 달달 외우고, 남들 하는 소리 씹어먹어가며 공부하긴 싫었다. 전공에 충실해봐야 취직에 도움 안 되는 건 고딩 때 전공에 충실해야 대학 못 가는 거나 매 한 가지였다. 그래서 남들 돌아보지 않는 길, 한눈 참 많이 팔았다. 공부하는 게 좋지만, 그래도 돈은 벌고 싶었다.
문학이든, 이학이든, 순수학문을 함으로써 어떤 식으로 세상에서 그걸 써먹을 수 있도록 convert할 수 있는지 항상 고민했다. 학교와 세상 사이의 끊임없는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이론과 실제, 그리고 적용이라는 모델화가 가능하도록 학문의 판을 바꾸고 싶었다. 비록 지금의 교수들은 전혀 관심이 없지만, 필요하다면 판을 바꿀 수 있는 힘을 키우고 싶었다.
잠 많고, 놀기 좋아하며, 덜렁덜렁 살아가던 내 천성을 바꿔야 하는 일이었지만, 70kg의 체중을 55kg까지 줄여가며 악으로 깡으로 살았던 그 노력 덕분에 나는 다른 고딩 동기들과 비교해도 결코 늦지 않은 시점에, 결코 나쁘지 않은 직장에서, 결코 나쁘지 않은 일을 하면서 살고 있다.
지금도 나의 목표는 아주 간단하다. 학교로 돌아가 대딩들과 치열하게 논쟁하며 글쓰며 공부하며 사는 것. 그러나 이왕 밥벌이로 일을 시작한 이상, 이 바닥에서 끝장나게 한 번 해 보고 갔으면 한다. 연봉? 직급? 그런 것 때문에 일하는 거 아니다. 웹스 시절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이 정도로 편안히 돈 벌면서 인생, 일에 대해 공부할 수 있는 여건도 그리 많지 않다. 그러니 더더욱 열심히 일해서 한타의 객 하면 최소한 "꽤 괜찮은 타이어쟁이"라는 소리 듣고 살고 싶다 이 말이다. 그래서 쉬는 시간 줄이면서, 자는 시간 줄이면서 일 좀 하겠다는데, 주변에서 불만이 많다. 웃긴 건 공부하던 시절엔 그러라고 부추겼음에도 말이지.
자기관리에 다소 소홀했다. 더 치밀해지고, 더 날카로워져야 하는데, 그래야만 성공할 수 있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외로워졌다. 아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그러지 말라고 하면서 나를 편안하게 만드는 데만 혈안이 되었다. 나도 어느샌가 그걸 즐기게 됐다. 몸에는 군살이 붙었고, 장에는 기름이 끼었다. 날카로운 인상은 부드럽게 바뀌었다곤 하지만, 나는 늘 무겁고 나는 늘 불편하다.
무심결에 남긴 리플에 달린 수많은 리플을 보며 나는 마음이 무겁다.
스스로도 다른 사람들이 나를 "알면 좋지만, 여하간 피곤한 사람"으로 간주하는 걸 잘 안다. 우연하게 구한 메신저 차단자 검색 프로그램에서 유게둘 멤버의 아이디가 나오는 것을 보고 꽤나 많이 서운했다. 솔직히 난 satag처럼 재미있는 사람도 못 되고, achor처럼 매력적인 사람도 못 되니까 그런 결과는 당연할테지만.
그러나 난 항상 삶은 현실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명박 시장처럼 자수성가할만큼의 능력도, 이건희 회장처럼 있는 걸 불릴만한 재주도 없지만, 꿈만 꾼다고 세상이 바뀌는 건 아니다. 세상을 바꾸는 건 혁명하자는, 투쟁하자는 말만 앞세우는 정치가 몇이 아니라, 뒤에서 묵묵히 땀흘리는 사람들의 두 손에서 나오는 것을.
춤추는 대수사선에서의 아오시마보다, 그를 지키고 기억하기 위해 위에서 온갖 어려움을 묵묵히 견뎌내며 그들에게 힘을 보태는 무로이를 더 좋아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상을 현실로 바꾸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다. 지난 번 탄핵 때도, 수백만의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모였을 때 제일 먼저 한 일은 "십시일반 돈을 모으는 것"이었다. 늘 그런 것만 보고 살았으니, 현실적이지 않은 일에 대해 "저거 왜 저래"라고 말하는 것이 습관이 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류의 말도 전혀 틀린 것은 아니다. 상관없는 일에 찬물 끼얹는 것,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끌어내리려는 것. 현실이 어떻고 목표가 어떻든 어디로 달려가든, 그리고 그것도 아니면 단지 꿈을 꾸겠다는 것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나와 다르다고 동조는 못할지언정 인정하고 박수는 못칠망정 거기다 초를 치면 되겠나.
하지만,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한다는 그 바탕 또한 '못마땅하지만..' 이라는 수식을 은연중에 생략한 상태에서 한 말이니 자신의 생각이 확고한 것이고, 그러니 다 이해할 필요 없이, 생각대로 평생 그렇게 살라"는 말에 나는 처음엔 화가 나다가 뒤에는 웃음이, 그리고 마지막엔 눈물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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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ag는 나와 참으로 많이 달랐다. 그는 나처럼 너무나 현실적인, 또한 너무나 현재중심적인 입장에서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을 싫어하고 미워했다. 이해심에 대해서는 참으로 나보다도 넓고 깊었지만 동시에 어떤 면에 대해서는 너무나 단호하고 적대적이어서 판단하기 쉽지 않았다. 그의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을 본 적이 없는 이들에게 설명하기란 쉽지 않지만, 파안대소하는 코믹한 표정과 그 분노의 표정을 동시에 기억하는 내게, 그는 참으로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런 그의 곁에 내가 지금껏 남아있는 것도 너무나 신기할 따름이지만, 그의 잠적에 가장 분노하고 분개하며 격분한 이가 또한 나라는 사실도 그렇다. 20년 지기 泓은 내가 그를 깊이 신뢰하였기에 배신감 또한 깊은 것이라고 말했다. 아마 나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1996년 가을을 잊지 못한다. 전공 배정이라는 너무나 첨예하면서도 또한 모두에게 중요한 문제를 앞두고, 누구도 쉽사리 나서지 못했다. 잘 아는 사람도 없었고, 솔직히 복잡한 문제였다. 결국 문제를 풀어낸 것은 우리 96학번이었다. 지금은 남아있지 않지만, Monorail은 그 때를 가리켜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던 상황에서 서로에 대한 믿음 하나로 버틸 수 있었다"고 했다. 그 말에 동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서로 너무나 보는 곳이 달랐고, 너무나 생각하는 것이 달랐음에도 지금껏 서로에 대해 든든한 믿음을 갖고 대할 수 있다는 것. 벌써 10년을 앞에 두고.
단순히 어려운 시기를 함께 넘겼다는 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대목이다. 믿음은 결국 서로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나온다. 호오(好惡)를 불문하고, 우리는 서로를 지극히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았고, 말하기에 앞서 한 번 더 그를 바라보고 이해하려고 노력했었다. 나는 단지 그들을 대신해 "조금 먼저, 조금 더 많이 움직인" 것에 불과하다.
그 시절 만난 두 명의 중요한 사람이 바로 achor와 satag였다.
처음 나우누리 동호회였던 칼라 소모임의 두목이었던 achor는 굉장히 독특한 인상의 소유자였다. 처음엔 그러려니 하다가, 독립을 하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런가보다 했을 뿐이었다. 성향이 다르다보니 자주 만날 기회는 없었다.
수능시험이 있던 11월 모임. 500cc 잔에 따른 소주를 원샷하면 머가 어떻게 되는지는 잘 몰랐다. 그저 나는 마실 수 있다며 벌컥벌컥 마셔서 주변을 놀라게 했고, 그 덕분에 선웅과 achor 역시 그 잔을 마셔야 했다. 그리고 나는 62-3에서 쓰러졌고, 다음 날 새벽, 속이 거북해 화장실에서 힘들어하고 있었다. 누군가 내 등을 두들기고 있었다. 표정없이. 그가 바로 achor였다.
satag와의 만남 역시 그랬다. 처음엔 그저 단순하게 PC통신 동호회의 회원으로 만났지만,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에 참 많이도 귀를 기울였다. 그는 어려운 공학적 이야기를 쉽게 풀어 이야기하는데 능했고, 나는 내 주변의 이야기를 내 나름의 Backdata를 근거로 분석하고 해석하는 걸 좋아했다.
결정적으로 유머 1번지 시절, 나름 피곤한 일에 휘말려 갑갑해할 때, 그는 항구우방 선언을 하고, 홈페이지를 새로 디자인해주었다. keqies.com이라는 도메인을 keqi.net으로 바꿔쓰게 된 것도 그 때부터였고, 20년 지기인 泓보다도 더욱 많은 것을 함께 나눌 수 있게 되었다.
너무나 맞지 않고, 너무나 많은 것이 달랐던 두 사람은 한 때는 동업자로까지 함께 했으나 지금은 가는 길이 참으로 다르다. 두 사람 모두와 벗이라는 사이로 만나고 있는 나 역시도,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언급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적어도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서 강점에 있어서만큼은 참으로 높게 평가를 하곤 했다. 척을 지고 있는 사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부담스러울만큼.
20년 지기였던 泓과 두 사람, 그리고 나, 그렇게 4자대면이 있었던 적이 있다. achor와 satag가 척을 지기 전, 넷은 신촌에서 소주잔을 기울였고, 뜻밖에도 나를 제외한 세 사람은 디아블로 II에 대한 이야기로 정신없이 재밌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의외로 泓은 두 사람 모두 디아블로의 대가로 인정하는 수준이었고, 그에 대한 반응도 천차만별이었다. satag은 잠적 전까지도 泓과의 대전을 바라는 듯 했으나, achor는 내게는 그런 내색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아무튼, 모임이 있은 뒤, 나는 泓에게 너무나 놀란 나머지 그 일에 대해 물었던 적이 있다. 그 때 그의 대답.
"너는 게임을 별로 좋아하지 않잖냐. 게임 뿐만 아니라 현실이 아닌, 현실성 없는 이야기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잖아. 그러니 너와는 게임 이야기보다는 문인들 이야기나 우리 이야기가 더 감칠맛 나지. 그런데 그 사람들은 현실에 대해서는 어떤지 모르지만 최소한 게임은 좋아하잖아. 나도 게임을 좋아하니, 그 이야기를 하는 거지. 너에게 하듯, 공지영이 어쩌고 신경숙이 어쩌고 하는 이야기로 그 사람들을 피곤하게 할 필요는 없는 거야. 아, 넌, 참, 문학도 별로 안 좋아하지. 맞다. -_-a"
泓이든, achor나 satag든, 사실 서로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맞지 않을 것 같던 우리는 참으로 좋은 벗이 되었고, 아마도 서로가 동성이 아닌 이성이었다면 지금쯤 돈독한 연인이자 동지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동지(同志). 나는 분명 그런 면에서 지기들, 또한 연인에게 벗이자 동지가 될 것을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모든 면에서, 매사에 나와 같은 태도를, 같은 생각을 취해달라는 것은 절대 아니다. 분명 넘을 수 없는 차이는 인정하되, 동시에 각자의 자리에서 의견을 모을 수 있다면 하나의 뜻으로 함께 하자는 것. 쉽지도 않지만, 아무한테나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런 면에서 내 지기들이 나에 대해 그토록 깊은 관심을 가져주는 것은 분명 당연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런 면에서 나는 매우 차가운 편이지만.
나는 꿈을 꾸는 것을 좋아한다. 동시에 나는 그 꿈을 이루는 것을 더욱 좋아한다. 꿈이 현실이 되면 그 꿈을 먹고 살았던 수많은 이들에게 삶의 희망이 되고 그 희망은 삶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주니까. 수많은 직장인들은 꿈을 꾸지만 그것은 이룰 수 없는 현실이 되고 그래서 체념하고 현실과 타협하던 그 모습에 안타까워하기만 할 수는 없었다.
satag와의 의기투합 또한 그 때문이었고, 우니옭이나 유게둘에 있어서 내가 그토록 과대포장이 되었던 것은 바로 그와 내가 벗이기 이전에 동지였고, 동지이기 이전에 벗이었던 탓이 아닌가 돌이켜본다. 늘 말하지만, 그는 내게는 무척 어렵고, 또한 편하며, 그래서 고마운 사람이었다.
나는 적어도 유게둘에 대해 그와 같은 입장이 되기를 요구한 셈이다. 예전 아처웹스의 멤버 보드에 대해서도 같은 입장이지만, 한 번 내 시야에 들어온 이상 그들은 나와 커뮤니케이션을 지속하고 있고, 또한 내가 지속적으로 애정을 갖고 지켜보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밤너구리 님의 홈페이지가 유게둘에서 사라졌을 때, 회사에서나 내 지인들은 밤너구리 님에게 중대한 사고가 생겼는지 궁금해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들은 누구도 밤너구리 님의 사이트 주소를 묻거나 그의 주소를 찾으려 하지 않았다. 당시 일에 대해 쑥대머리는 이런 회고를 한 바 있다.
"유게둘은 일종의 커뮤니케이션 공간이다. 단순한 사이트 링크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떤 멤버십이 필요한 공간도 아니다. 보는 이들에게는 완전히 열려 있으나 막상 그들(유게둘 멤버)끼리는 나름의 동질의식이 형성되어 있는 일종의 닫힌 공간이다. 물론 객과 같이 외부의 보는 이들을 고려한 열린 커뮤니케이션의 개념으로 이해한다면 좋겠지만, 적어도 satag나 다른 멤버들은 그런 식으로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쉽게 말하면 그렇다. 지금 싸이월드가 닫히면 수많은 사람들은 미니홈피를 잃고 커뮤니티를 잃는다. 지금 싸이의 미니홈피는 아주 대중적인 형태의 공간이지만, 또한 많은 사람들은 그 공간을 부담스러워하거나 혹은 버려둔 채 방치하고 있다. 그렇다 하여 그들의 공간(미니홈피), 혹은 공간에 대한 접촉권(ID)을 빼앗는다면, 싸이월드 내 커뮤니티만을 접촉하거나, 다른 이들의 미니홈피를 방문하는 그들의 권리를 빼앗는 일이다. 적어도 어떤 서비스가 시작되었고, 그것이 순기능적으로 돌아가고자 한다면 단 한 사람의 유저가 있더라도 이는 지속되어야 한다.
상업용 사이트가 그럴진대, 이와 같은 비영리 사이트는 더욱 그렇다. 쑥쒀쓰 군의 씨브랄송군의 홈페이지가 제 아무리 놀고 있다 한들, 그들의 홈페이지가 없어지지 않는 한 이 공간에서는 그들의 링크를 제공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곳을 통해서만 그들을 만날 수 있는, 정말 웹 서핑하는 능력밖에 없는 유저들이라 할지라도, 유저들의 권리 또한 지켜져야 하는 것. 이것이 홈페이지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의 기본적인 원칙이기 때문이다.
zoo님 홈페이지의 무단 링크 사건에 대한 내 입장 또한 그렇다. zoo님과 신선달님의 홈페이지의 hierarchy를 먼저 읽지 못한 나의 잘못으로 zoo님이 불편함을 표명한 것은 분명 가능하고, 마땅히 내가 이에 대해 양해와 사과의 뜻을 표명해야만 한다. 그러나 동시에 "열린 커뮤니케이션"의 개념으로 보자면, 이를 "내 공간의 '일부'만을, 그것도 허락없이 무단링크했으니 기분 나쁘다"라고 표현한 것은 다소 어패가 있지 않았나 싶다. 같은 분의 홈페이지 내에 있는 '대부분이 무단링크'라고 밝힌 사이트 링크 페이지를 관계 당사자가 아닌 제3자가 과연 어떤 식으로 해석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한번쯤은 고려했어야 옳다고 본다.
장르노군(장박)이나 bl4zt님과 같이 유게둘의 취지를 가장 잘 살려 사용하고 있는 유저들의 경우는 또 어떠한가? 법률적으로도 이는 유게둘 멤버들에게 사전 동의를 득하지 않은 명백한 불법행위로써 이에 따르면 만일 장박이나 bl4zt님께서 소를 제기할 경우 관리자에게 민사상의 책임에 따른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충분한 가능성을 제기한다. 또한 이는 민법 뿐만 아니라 정보통신 관련 각 법규에서 다시 한 번 보장하고 있는 내용이기도 하다.
새아침오락실에서 satag와 여인2님 사이에 있었던 다소 불미한 사건에 대해 접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물론 이 일은 유게둘과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할 수도 있)는 새아침오락실에서 벌어진 일이니 여기서 논의하는 것이 어패가 있을 수는 있지만, 남아있는 글을 읽은 내 소감은 솔직히 양비론에 가깝다. 두 사람을 모두 알고 있는 나의 판단으로서는 그렇다. 그렇게 함으로써 두 사람은 과연 서로 무엇을 얻고자 함이었을까? satag의 辯이나 여인2의 글에서 느껴지는 씁쓸함은 단순히 두 사람의 싸움이 서로의 탓이었다는 식의 이야기를 도출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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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것에 대한 가장 명백하고도 확실한, 그리고 분명한 결론을 내린 사람은 바로 0 선생의 이 한 마디다.
"결국 모든 건 이해의 문제로 남는 것 같다. 날도 더분데 땀 삐질거리며 뜀박질하는 사람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머리만 아픈 게임 하느라고 컴 앞에서 밤새는 거 이해 못하는 사람이 있고, 공부 안하고 놀기만 하는 아이 이해 못하는 부모도 있고, 한참 놀 때에 공부만 하라고 하는 엄마 이해 못하는 아이도 있다. 이해의 차이에서 오는 트러블을 이해 자체가 아니라 체념으로 풀기 시작하면 인간 관계는 위험해진다. 나도 많이 부족하지만 감히 나는 우리 서로가 조금씩 더 이해하자고 말하고 싶다. 사랑하니까."
故 정은임 아나운서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몇몇 사람들이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하기에 나는 웃으면서 설명을 서둘러 마무리지었다. 그리고 이렇게 사족을 덧붙였다.
"당신은 신해철의 고스트 스테이션을 들어본 적이 있나? 솔직히 내가 들어도 충격적인 촌철살인의 멘트도 많지만, 왜 중고딩들이 그에게 그토록 열광하는지 잘 모르겠어.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들이던, 기성세대던, 별밤을 통해 왜 이문세가 '밤의 교육 대통령'이란 칭호를 받고, 정은임이 그토록 '정영음'이라는 미답의 고지에 올랐는지 잘 모를 거야. 그 분위기, 그 시대상, 그 느낌. 그것은 또래가 아니면, 그 문화를 공유하는 사람이 아니면 잘 모를테니까. 마찬가지로 우리가 '서금옥의 이브의 연가' 혹은 '황인용의 밤을 잊은 그대에게'를 이해할 수는 없을 거야. 그 시절 그 사람들의 느낌을 모르는 거니까. 하지만, 할 수 있는 건 있잖나? 그런 시절이 있었고, 또한 이런 시절이 있었더라고. 이해하려는 노력은 해 봐야지."
그 이해를 위해 나는 지금도 노력을 한다. satag은 "사람을 만나고 조언을 듣는 것에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고 극찬을 했지만, 그것은 내가 받을 칭찬이 아니라, 그러한 내 조그만 노력에 성의를 보여준 모든 이들이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커뮤니케이션은 결코 혼자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이 글을 유게둘 올거보-드에 남길 것인지, 여기에 남길 것인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이 곳에 남긴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건 내 생각이지 유게둘의 공식입장은 아니다. 내가 글을 쓰면 '선량한 관리자'라는 직함을 들먹거릴 게 뻔하다. 그럼 말해봐야 소용없다. 그것은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다. 이해의 차이는 트러블이 될 수는 있지만, 체념하면 그것은 그 사람들과의 연을 끊자는 것 말고는 없다. 서로가 좀더 노력하고 그래서 열린 커뮤니케이션을 해보자는 거다. 단순히 재미만을 추구하기엔, 이 공간에 모인 우린 서로 바쁘고 또한 서로 할 일이 많다.
쓰다보니 나도 은근히 잘못이 많다. 한편으로는 서운함이 많다. 이 모두를 해결하는 일은 모두가 거하게 만나 곡차 한잔에 회포를 푸는 길밖엔 없지만, 다들 바쁘다. 나는 오늘도 취할 수밖에 없으니, 글이 나오는 대로 모니터를 끄고 오랜만에 알콜을 벗삼아 TV를 보련다. 올림픽 기간이다. 어쨌든 나는 한국사람이고, 어쨌든 나는 태극기를 흔들 수밖에 없을테니까.
역시나 치열한 삶을 사시는 객 선생이십니다 그려. 한없이 뒹굴거리기만 하는 본방은 부끄럽기가 그지 없구려. 알면서도 어찌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이놈의 [습]의 무서움이 아니겠소이까. 습의 차이이건 본성의 차이이건 개인의 차이는 분명 존재하는 것이고 화해가 중요한 것이 아니겠소.
여기서 다시 본방의 얘기를 좀 해야겠소. 본방의 고향은 사탁과 같은 포항이란 곳으로써 서울에 비하면 매우 작은 도시지요. 규모가 작다는 사회 구조의 특성상 동네에서 일어나는 일은 거의 모두가 알고 익명성은 거의 보장되지 않았소. 맨날 만나는 친구가 그 친구라서 그런지 친구라면 간이든 쓸개든 빼주어도 좋았소. 인간을 본디 이기적인 존재라고 가정한다면 내가 이 친구에게 쓸개를 빼주면 언젠간 이 친구가 내가 간을 주겠지하는 은연중의 심리때문이었나보오. 뭐 지금에야 그렇지 않았을까 생각하는 거오만, 그 당시엔 아무 생각 없었다는 게 더 맞을 것 같소. 여튼 그 사회의 분위기가 그러했소. 그런 사회에서 자란 본방도 친구라면 부모보다 좋았고 간이고 쓸개이고 다 빼줄 수 있었소.
그러고 96년 서울에 있는 대학이라고 왔소. 서울은 그야말로 충격이었소. 지하철 역에 가만히 앉아있어도 인간들이 끊임없이 왔다 갔다 하오. 수없이 많은 인간, 완벽한 익명성. 하지만 지하철 역이 보여준 서울은 그저 신기한 곳이었을 뿐, 난 아직 서울을 모르고 있었소. 낯설기만 하던 서울 생활이 익숙해져갈 무렵 불현듯 서울이 내게 다가왔소.
그 무렵엔 시골생활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참으로 분방하게 살았던 듯 싶소. 매일 매일 술이었고 또 친구도 만났소. 서울 친구도 내겐 간이었고 쓸개였소. 그러던 어느날 믿고 있던 친구가 술을 마시고 이런 얘기를 합디다.
"넌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것 같애. 너무 부담스러워."
아무렇지도 않을 수도 있는 얘기지만 그 당시의 나에겐 너무나도 충격적이고 슬픈 얘기였소. 그때 난 나란 놈이 양날의 검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소. 간이나 쓸개를 줄 수 있다는 말은 당연스레 간이나 쓸개를 요구할 수 있다는 말. 나의 간의 요구는 어릴적부터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란, 때문에 내 간을 누군가에게 주면 되돌려 받을 길이 만무한 사회 구조속에서 자란 아이들에겐 너무나 큰 부담이었던게요. 그걸 깨달은 날 밤, 서울은 내게 다가왔소.
불행히도 나에겐 간이 하나밖에 없었고 내가 살 길은 나 역시 가슴을 닫고 간을 고수하는 것이었소. 서울 생활 어언 8년, 이젠 서울말도 잘 하고 실속도 잘 챙기는 놈이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날이후로 나는 아직까지 타인들과의 소통에 어려움을 겪고 있소. 언젠가부터 눈앞의 인간이 어떤 형의 인간인지 재는 버릇도 생겼소. 저놈에겐 얼만큼을 주어야할까. 저놈에겐... 때문인지 언젠가부터 나는 새로운 인간 관계를 형성하는 데에 꽤나 소극적인 사람이 되었소. 사람가지고 재는 일에 능숙하지 못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소통의 해법을 찾을 때까지는 미적지근하고 불편한 관계들을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소.
그간 나름의 고민이 찾아낸 해법은 역시나 [규모]였소. 개인적인 성향 탓도 있겠지만 나는 카네기의 인간관계론보다 [오래된 미래]에서 볼 수 있는 인간 사회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고 있소. 카네기는 워낙이나 유명한 사람이니 알 것이고, [오래된 미래]라고 하면 한 스웨덴 언어학자가 인도와 티벳의 국경에 있는 아주 작은 불교 도시에서 얼마나 유기적이고 따뜻한 인간 관계가 형성되는지를 보고 쓴 책이오. 많은 인간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것보다 적은 인간, 아니 이웃을 인간으로 대하는 것이 내겐 훨씬 편하고 자연스러워 보인다오.
나눔은 따뜻함을 동반하오. 하지만 이 대규모의 경제 사회에서 개인간의 나눔은 물질의 이동이상이기는 힘들다고 생각하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전능한 존재라면 한없는 나눔을 줄 수 있으련만 내겐 너무 버겁소. 때문에 나의 꿈은 내 지기들과 아주 소박하고 작은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었소. 아직도 니어링을 읽으면 가슴이 뛰지만 사실은 게으름의 먼지 때문에 이제는 너무나 먼 얘기가 되어 버린 것 같소. 현실로 돌아서면 돈이 문제이고 농사를 지어 돈을 벌기란 쉽지가 않소. 일단 뭐라도 해서 돈을 벌어야겠지만 그럴려면 대규모의 경제사회에서 뛰어야하니.
..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고 또 딴 데로 흘러가는 듯 하니 이제 마무리를 해야겠소.
어찌됐건 우리는 지금 서울에 살고 있고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수많은 인간 관계를 형성하고 살고 있소. 인터넷은 서울보다 훨씬 큰 규모의 사회이며 익명성도 더 보장되오. 이런 인터넷에서의 인간관계의 긴장이라니.. 어찌됐건 해법을 찾아야할텐데... 얼마 전 티비에 김훈 작가가 나오더구려. 잘 몰랐는데 극단적인 남성우월주의자더구려. 기자시절 특유의 여성 비하적인 기사로 많은 문제를 일으켜 사표만 20번 이상 썼다고 하니 대충 짐작은 가오. 그의 작업실 벽에 이런 글이 쓰여 있더구려. 生而不居. 결국 오늘 하고 싶었던 말이오. 이말 한마디 하려고 이 장황한 글을 쓰다니. 이 몸도 글재주는 워낙이 없구려. 허허.
어쨌건 곡차 한 잔이 필요한 시기인 것 같기는 하오. 불행히도 집사람한테 잡혀사는 사람이라 술을 못 마시는 처지가 되고 말았소. 아니 안 마시는 걸로 해둡시다. 허나 대신 집사람이 대작해줄터이니 걱정일랑 붙들어매시고 연통을 주시오.
코큰 사람들이 많이 쓰는 블로그라는 것에는 트랙백이라는 개념이 있는데 객 선생의 글 같은 것은 트랙백으로 날려주심이 좋을 것 같소. 블로그. 이거 참 재밌소. ㅎㅎ. 혹 시간 나시면 설치해보심이...
조그는 제로보드와 연동이 된다오.
그리고 이름이 한 글자이면 글이 안 써지는구려. 아마 관리자모드에서 수정해주셔야 할 것 같소. 덕분에 간만에 [00000000]로 글을 쓰는구료.
2004-08-24 15:50:39
Keqi
답이 꽤나 많이 늦었습니다.
저는 불미하게도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을 읽은 적이 없습니다. 그저 팀장님들께서 그런 책을 본다는 사실만 알고 있지요. 솔직하게 말하면 저도 라다크의 '오래된 미래'에 나름의 미련을 가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구요. 하지만 적어도 서울 땅에서 그런 따뜻한 기억을 간직했던 터라, 전혀 불가능하지 않다는 생각을 갖고, 그저 좀더 노력해보는 게지요.
生而不居. 참으로 좋은 말입니다. 저같이 억겁의 인연에 목을 맨 사람에게는 참으로 필요한 대답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쨌든 유게둘에 대해서든, 다른 인간관계에 대해서든, 저는 당분간 힘을 좀 빼고 살까 합니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말이죠.
블로그 주소는 수정했고, 조그는 잘 모르니 나중에 보면 직접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아울러 이름 한 자로 고치는 건 이게 옛날 나우누리를 수정하면서 만든 보드라 그런 기능을 안 만들어 놓은 것 같습니다만, 아무튼 확인하고 수정토록 해 보겠습니다.
2004-08-28 18:4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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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저 또한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을 읽은 적이 없습니다. 제목만 보고 대충의 내용만 짐작한게죠. 제가 좀 그렇죠 대충 보고 판단해버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