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낙방을 한다면... (2003-11-28)

작성자  
   achor ( Hit: 2147 Vote: 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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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개인

1.
이렇게 공부를 하고 있는 건
꽤 오랜만의 일이다.
지난 학기 말에도 공부를 조금 한 기억은 있으니
근 반 년만의 일이던가.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따위를 공부하기 위하여
시간을 투자하는 일은 이미 8년 전에 그만 둔 나이지만

내일의 시험은
졸업 여부를 판가름 짓는 한문 시험.
만약 내일 합격하지 못한다면
나는 다시 한 학기를 더 다니게 되는 위기를 맞이할 수도 있다!
실로 비극적인 일.

그리하여 저녁 8시가 조금 넘어
나는 학교 도서관에 입성하였고,
형님이 나의 합격을 기원하시며 사다 주신 기출문제 문제집을 열.심.히. 보고는 있는 중.



2.
사실 이렇게 공부는 하고 있지만
내일 합격할 것을 예상하고 있지는 않다.
요구하는 한자능력검정시험 3급이 이렇게 하룻밤만에 얻어질 거라고는 생각치도 않는 데다가
이미 지난 학기, 나는 한 차례 떨어진 적도 있는 바이다.

대학 입시 때 한문 본고사를 봤다는 경험만으로 한문을 선택하긴 했지만
이미 많은 시간이 흘러버린 지금,
내가 그 시절의 한자들을 기억하고 있을 거란 예상은
나에 대한 과찬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바쁜 와중에서도
떨어질 것을 예상하면서 이렇게 시험에 임하려는 까닭은
만약 시험을 보지 않는다면 내가 결국은 많은 후회를 할 거란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역시 생각하는 건 진인사대천명이다.
아. 한문을 공부하고 있으니 한자로 쓰자.
盡人事待天命.
보고 썼을 거라 의심하지는 마라. 이 정도는 쓴다. --;

아무리 실패를 예상한다 하여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면 나는 나에 만족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안 될 것이란 소극적인 자세로 피해버린다면
그것은 커다란 후회를 남기리라.
불끈!

음.
아.
오해를 살 수도 있겠는데,
맞다. 나는 그리 도전적이거나 진취적이거나 혹은 밝고 맑은 정신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아니다.



3.
도서관에 도착하니
우리 학교 학생도 아닌 데다가 나이도 27살이나 먹어버린
다미가 공부를 하고 있다.

다미가 원래부터 착했던 건지 아니면 오늘부터 착해진 건지 가늠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다미는 저녁을 못 먹은 내게 오뎅을 사줬고,
밤새 공부하겠다고 호언장담을 늘어놓는 내게 커피맛 과자와 음료를 선사해 줬다.
게다가 도서관 문 닫을 시간이 다 되어 떠날 때에는
우산 없는 내게 우산까지 임대해 줬다.
착한 것. 후에 밥 한 번 쏘마.

일반열람실 종료시간이 되어 밤샘열람실로 이동을 하였더니
만석이다.
인간들, 취업이 어려우니 열나 공부를 하나 보다.

어쩔 수 없다.
정규네로 찾아간다.

사법고시 준비한다는 정규는
한 여성, 그의 말로는 쭉쭉빵빵이라는,과 통화중인 상태다.

나는 내 합격을 고대하는 형님과 vluez, 충형님을 위하여
상황을 무시하고 책상에 앉아 공부를 시작한다.
물론 전화하는 정규에게 소개팅 부탁하는 일은 잊지 않았지만.

자. 공부를 하자!



4.
한문 공부를 하며 느끼는 것은
한자가 얼마나 비효율적인가에 대한 회의다.
이건 온통 외우지 않으면 그만인, 꽤나 불공평한 승부다.

타인들처럼,
나이를 먹어버려 이젠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핑계를 달지는 않겠다.
나는 그 어떤 잘 나가던 시절에도
하룻밤만에 1,807개의 한자를 암기하는 일에는 실패했을 게다.

역시 가망성 없는 승부라는 걸 충분히 인식하면서도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은 잊지는 않으려 노력한다.

그러면서 이런 글이나 적고 있다. --;



4.
올 초 잠깐 품었었던 고시공부의 꿈에 미련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공부하는 게 그리 나쁘지만은 않아 보인다.

오직 적막만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한 줄기 스탠드 빛을 받으며 나와의 싸움을 한다는 일은
막상 해보니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어 보인다.

특별히 잡생각이 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있는 게 좀 쑤시지도 않고,
뭐 그런대로 괜찮다.

가끔은 대학 초년의 추억들이 스쳐가기도 하지만
한 번 가볍게 미소 짓곤 다시 책 속에 얼굴을 묻는다.

다시 공부를 하자!



5.
아. 잠깐.
다시 공부를 하기 전에 한 가지만 돌이켜 보자.

아까 도서관을 나올 때
우산이 없어 현관에서 서성이던 그녀는
예뻤던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정규와 전화통화를 하느라 자세히 못 본 탓이리라.
에잇.
그녀에게 함께 우산을 쓰고 가자고 말할 걸 그랬나.

그러고 보니
마치 영화처럼
언젠가 비오던 날, 내 우산 속으로 뛰어들어온 여자가 있었다.

올 봄.
촉촉하게 봄비가 내리던 어느 아침의 일이었다.
나는 당시 어머니의 냉장고 때문에 회사를 잠시 다니고 있던 중이었고,
또한 출근을 하던 길이었다.

봄 내음새를 맡으며 나풀나풀 걸어가고 있는 내 우산 속으로
좋은 향기를 품어내는 한 여인이 들어왔다.

"저기까지만 같이 갈 수 있을까요?"

나는 당연하게도 행동보다 말이 더 빠르게 승락을 해버렸고,
그리곤 그녀를 보았을 때.

아.
그녀는 유부녀 같았다. !_!

역시 출근길 같았던 그녀는 일반적인 아줌마와는 달리
커리어우먼의 형상이긴 했지만
한점 부끄럼 없이 살아가는 내게 불륜은 안 된다.
아줌마는 즐이다.
끙.

그녀에게 함께 우산을 쓰고 가자고 말할 걸 그랬나.
아까 도서관을 나올 때
우산이 없어 현관에서 서성이던 그녀는
예뻤던가?

에잇.
내가 내일 시험에서 낙방을 한다면
그건 전적으로 그녀 탓일 게다.

우산이 없어 현관에서 서성이던 그녀는
예뻤던가?

- achor WEbs. ac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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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rina2003-12-03 21:50:45
왜 이글을 못봤지? 자주 들어오는데, 요즘 통~글이 없다했더니, 11월글들은 그래도 좀 있었구나.
그래서 시험은 잘 본게야? ㅋㅋㅋ 간만에 재미있는 글이야. ^^

 achor2003-12-03 23:23:41
오직 너를 위해서!
바쁜 와중에서도 기록을 적어나가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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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Written: 09/27/2001 13:51:56
Last Modified: 09/06/2021 17:5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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